삶을 어루만지는 손길…‘우리는 다시 먼바다로 나갈 수 있을까’[김윤정,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 읽기]
intro
“나는 독서 중의 독서, 구극(究極)의 책 읽기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 읽기’라고 생각한다.”(김무곤 교수 ‘종이책 읽기를 권함’ 중에서)
가정을 이루었고 두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도, 나는 늘 자신의 쓸모에 대해 걱정했다. 하지만 2011년 겨울. 이 짧은 문장 하나가 내 인생을 극적으로 바꾼다. 어떠한 용도도 없는 가장 순수한 읽기라니! ‘별 의미도 목적도 없이 읽는 행위’ 위에는 시간이 나이테처럼 축적됐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임계점을 지나면서 나는 진정한 풍요로움을 맛볼 수 있었다.
이제 그 이야기를 쓴다. ‘김윤정,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 읽기’ 그 열여섯 번째는 이주영의 ‘우리는 다시 먼바다로 나갈 수 있을까’(오늘산책)이다.
“치료하는 내내 사심 가득 담아 아이들의 보들보들한 손가락을 만지고, 상담하는 내내 욕심껏 아이들의 눈을 들여다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귀한 존재들에게 건강과 생명을 선물하는 일이고, 세상에서 우리만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소아청소년과 의사 이주영의 저서 ‘우리는 다시 먼바다로 나갈 수 있을까’ 속의 한 구절이다. 만지고 싶은 충동을 누르는 일은 무척 어렵다. 복숭아를 고를 때 손가락으로 꾹 눌러 보고 싶고, 딸기를 살 때는 살짝 집어서 냄새를 맡아 보고 싶다. 하지만 ‘만지지 마시오’라는 문구의 압박 때문에 슬그머니 눈치만 보며 고를 수밖에 없다. 나는 카페나 식당에서 유아차를 타고 온 아기의 손과 발을 보면, 꼭 그런 마음이 든다. 만지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 번만이라도 만져 보고 싶어 무진 애가 탄다. 그 보드랍고 말캉한 감촉의 발바닥을 만지고 있노라면 따스하다 못해 나른한 오후 햇살이 살며시 마음에 비집고 들어오는 느낌이랄까. 무작정 얼굴에 비비고 싶어진다.
나는 작고 순수한 아이들이 좋아서 유아 교사가 됐다. 아침마다 울면서 오던 아이가, 어느 날 ‘떤땜미’를 외치며 웃으면서 달려오는 일이 생긴다. 엄마 손을 놓지 않던 아이가 휴일에도 유치원 가야 한다며 가방을 메는 일도 있다. 아이들이 경험하게 되는 첫 번째 사회에서 저마다 작은 자부심 하나씩 마음에 심어지기를 바라며 아이들을 대했다. 현장을 떠날 때는 유아 교사로 7년 장기근속을 한 나를 스스로 꽤 자랑스러워했다. 무슨 일이든 오랜 시간을 쌓았다는 것은 쉽게 간과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15년 이상 소아응급실에서 일할 수 있었던 저자의 원동력이 무척 궁금했다.
응급실은 환자들이 밀물처럼 들고 썰물처럼 떠나는 긴박한 바다다. 그 짧은 만남으로 인해 간혹 의료진의 애정은 진정성을 오해받기도, 상처로 돌아오기도 한다. 그래서 너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더 하지 못하고 감추어야 하는 말이 있다고 한다. 때로는 마음속의 다정을 다 내어 보이는 일이 결코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닐 때도 있기에 마음을 가라앉힌다.
“눈에 보이는 기록은 10년 동안 서버와 창고에 저장되지만, 보이지 않는 우리의 마음은 아이가 우리 곁에 머무는 내내, 어쩌면 아이가 우리 기억 속에 머무는 내내 병실을 맴돌아 떠나고 문득 다시 피어나기를 반복한다.”
보이지 않는 마음을 이야기하는 의사라고? ‘낭만닥터 김사부’나 ‘슬기로운 의사’는 드라마 속에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한 문장 때문에 이주영이라는 사람에게 기대감이 생겼다. 한밤중의 소아응급실에서 때로 보살핌이 필요한 이는 아기보다 엄마·아빠일 때가 있다. 아이를 돌보는 사람들도 때로는 돌봄이 필요하다. 어쩌면 더 많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곧 괜찮아질 거라고, 모든 것이 잘될 거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은 저절로 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애쓴 결과일 거라고 말해 주는 누군가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고 그녀는 전한다.
‘괜찮다’는 말은 박하사탕 같다. 입안이 시원하면서 달콤해진다. 의사 선생님이 괜찮다고 말해 주면, 아프던 몸이 갑자기 조금 덜 아파지는 기분이 든다. 마음은 또 어떤가. ‘내가 꼭 낫게 해 줄게요’ ‘곧 다 나을 거야.’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아서 이내 안심이 된다. 괜찮다는 말에는 당부와 신뢰가 들어 있다. 의료 행위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선다. 곧 나아질 거라는 말, ‘돌봄’을 하는 이의 마음을 돌보는 말, 그런 말을 건네며 마음을 어루만지는 그녀가 어쩌면 드라마 밖의 김사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현실은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를 지원하는 전공의들이 사라지고, 수년에 걸쳐 이미 충분히 훈련된 전문의들마저 현장을 떠난다고 한다. 저자는 경험의 축적과 전수가 사라지는 소아청소년과를 ‘노인이 사라지는 바다’라고 말하며, 우리가 다시 먼바다로 나갈 수 있을까를 걱정한다. 명의를 만들어 내고, 노인들이 함께하는 먼바다를 만드는 것은 서로를 향한 진심과 신뢰라고 생각한다. 아이를 믿어 주는 부모와 부모를 지지하는 의사, 의사를 신뢰하는 부모가 똘똘 뭉쳐 한 팀이 돼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힘은 의료진이 잘 벼린 칼 같은 정확함과 단호함을 내세우게 하고 나아가 의술이 제대로 발현되게 한다. 서로를 향한 조용한 신뢰야말로 의술의 빛을 발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다. 이제 그들이 하는 일은 단순한 의료행위가 아니다. 진심을 담은 자상한 손길이다. 안녕을 비는 신실한 기도다. 마침내 그것은 삶을 어루만지는 구원이다.
“아이들을 진료하는 것은 병을 다루는 일인 동시에 삶을 만지는 일이다.”
김윤정(서평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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