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현 요리사 “모셨던 대통령들 집 찾아 1년에 한 번쯤 요리하고파” [차 한잔 나누며]
20년4개월간 보수, 진보 대통령들 밥상 책임
대통령들의 소울푸드 모두 서민적이고 평범
최초로 주방에 들어온 노통, 직접 라면 끓여
박통, 청와대 떠나던 날 주방·청소 직원 찾아
“모셨던 대통령들, 일 년에 한 끼 대접하고 싶어”
천 대표는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까지 총 5명의 대통령 내외 밥상을 책임지다가 2018년 7월30일 청와대를 나와 자신의 이름을 내 건 중화요리점 ‘천상현의 천상’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청와대가 개방된 후 비로소 대통령의 식탁과 청와대 주방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게 된 그는 최근 책 ‘대통령의 요리사’(쌤앤파커스)도 냈다. 지난 12일 오후 양재동 ‘천상현의 천상’ 본점에서 천 대표를 만났다.
그는 최연소, 최장수 청와대 요리사다. 당초 청와대에는 한식, 양식, 일식 요리사만 있었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이 중식을 좋아한 덕에 그는 최초의 중식 요리사로 청와대에 입성했다. 정권이 바뀌면 비서실을 비롯해 주방까지 모두 교체하면서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주방 1명, 홀 서비스 1명만 남기는데 그는 늘 자리를 지켰고 덕분에 중식도 살아남았다.
명예로운 자리지만 국가 원수의 식탁을 책임진다는 것은 단순히 요리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의 건강과 컨디션 뿐 아니라 사회적 분위기를 살피고 때로는 정치적 메시지도 담아내는 복잡다단할 일이다.
일례로 2010년 가을 배추 가격이 한 포기에 1만원이 넘을 정도로 폭등하자 대통령 식탁에 배추 대신 양배추김치를 올리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광우병 파동 후 2008년 조지 W. 부시, 2009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각각 방한했을 때는 미국산 소고기와 한우 불고기를 함께 상에 올렸다.
“당시 두 분께 특별한 음식보다는 속 편하고 소화 잘 되는 음식, 가장 즐겨드시던 음식을 해드렸죠. 탄핵 때 뿐 아니라 하루종일 사무실에 뉴스를 틀어놓고 청와대 분위기나 상황을 살펴 그에 맞게 음식을 준비합니다.”
대통령들의 소울푸드는 모두 서민적이고 평범했다. 대식가인 김대중 대통령은 불도장과 홍어, 노무현 대통령은 모내기 국수와 ‘토속촌 삼계탕’, 이명박 대통령은 돌솥간장비빔밥, 박근혜 대통령은 나물과 홍어찜, 문재인 대통령은 ‘효자동 메밀국수’를 즐겼다.
한 대통령 임기 동안 차린 밥상만 대략 5000끼 이상. 대통령의 해외 순방과 휴가 때도 동행하다 보니 측근이나 언론을 통해 알려지지 않은 일화나 인간적인 면도 많이 접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최초로 주방에 들어온 대통령이시고, 홀에서 서빙하는 직원들 이름을 모두 기억해주셨죠. 일요일 아침에는 직원들더러 절대 나오지 말고 쉬라면서 직접 라면을 끓여드시고, 가족들이 머물 때도 대통령 내외께서 드시는 시간 외에는 절대 따로 차려주지 말라고 하셨죠.”
“박근혜 대통령은 생일만찬이 끝난 후 직접 주방에 찾아오셔서 ‘잘 먹었어요. 잘 준비해줘서 고마워요’라고 인사를 건네셨어요. 그리고 2017년 3월10일 청와대를 떠나던 날 마지막 순간에 관저 청소하시는 분들과 주방 요리사들을 모두 대식당으로 불러 그동안 정말 고마웠다고, 언젠가 진실은 밝혀질 것이라고 하시는데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었죠.”
그 때 그의 눈에 대통령의 구멍 난 스타킹 사이로 발가락이 들어왔다. 늘 단정하고 빈틈없던 대통령이었는데 구멍난 스타킹에 초췌한 얼굴을 보니 그 짧은 순간에 여러가지 생각이 교차하며 안타까웠다고 한다.
정권이 바뀌는 20여년간 보수, 진보 진영 대통령 모두와 함께 할 수 있었던 비결을 물었다.
“굳이 꼽는다면 요리 실력은 기본이고 운, 자기관리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실력이 아무리 좋아도 운이 따라주어야 하고, 제가 가장 신경쓴 것은 자기관리입니다. 술 먹고 다음날 일찍 못일어나거나 실수를 해서 구설수에 오를까봐 거의 마시지 않았고, 친구들과 만날 때도 항상 말과 행동을 조심했습니다. 전염성 질환 등에 걸리지 않도록 건강과 위생을 철저하게 관리하는 것은 기본이고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김대중 대통령이 최규하, 김영삼, 노태우, 전두환 전직 대통령들을 초대해 5명의 전현직 대통령이 모였을 때다. 그가 청와대에 들어간지 불과 1년여 지났을 때다.
“정말 ‘뭣도 모를 때’였는데, 지금 생각해도 설렙니다. 마지막 코스를 좀 남기셨는데 ‘맛이 없어서가 아니라 배불러서 남긴 것이니 오해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는 청와대를 나온 후 광화문에 작은 중식당을 내면서 ‘청와대 요리사’라는 경력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러나 방송 출연후 20평 남짓한 식당이 감당할 수 없을만큼 손님이 몰려들자 양재동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본점을 내고 10월 중순 경기도 가평에도 2호점을 냈다.
그러나 그는 사업을 확장하기보다는 후배 요리사들을 돕는데 힘을 쏟고 싶다고 했다.
“요리사로 성공하려면 요리실력도 중요하지만, 인성과 사회성이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토목공학을 전공한 제가 신라호텔을 거쳐 청와대 요리사로 20년 넘게 일할 수 있었던 것도 성실한 모습을 보고 많은 분들이 기회를 줬기 때문이죠. 후배들에게도 이런 점을 가르쳐주고 싶습니다.”
대통령들의 청와대에서 첫 식사부터 마지막 식사를 준비하며 권력의 덧없음을 목도해온 그다. 역사의 평가가 어떻든 그에게는 “다섯 분의 대통령이 한 분과도 같다”고 한다.
“기회가 된다면 제가 모셨던 대통령들 댁에 찾아가 일 년에 한 번이라도 음식을 해드리고 싶어요. 그게 우리나라의 정 아닙니까.”
김수미 선임기자 leol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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