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손주는 ‘엄마의 엄마의 엄마 성’을 따랐다고 할 수 있도록”[‘엄마 성 빛내기’ 플랫 입주자 프로젝트]
낳는 것도, 양육 책임도 엄마 몫이라면서
왜 아이에 아빠 성 주는 게 당연한가 의문
의성 김씨 아버지와 경주 김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김선경씨(62)는 아버지 성인 의성 김씨를 따랐다. 선경씨는 사성김해김씨인 남편과 1988년 결혼했고 10개월 만에 딸 김준영씨(35)를 낳았다. 준영씨는 아버지의 성인 사성김해김씨를 따랐고 대를 거듭할수록 선경씨의 어머니 성인 경주 김씨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2019년 결혼한 준영씨는 아이에게 자신의 성을 주고 싶었다. 아이를 낳는 몸도 엄마의 몸이고 온 사회가 엄마들에게 양육의 책임을 더 부과하면서 왜 아이에게 아빠의 성을 줘야 하는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준영씨의 생각을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준영씨를 아끼는 친구들도 굳이 그렇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고립된다고 느꼈을 때 선경씨가 준영씨에게 말했다. “엄마부터 엄마 성으로 바꿔볼게.”
선경씨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집안은 원래 그렇다고 설명해주려고 한다”고 말했다. “저부터 엄마 성으로 바꾸면 제 손주는 엄마의 엄마의 엄마 성을 따랐다고 할 수 있을테니까요. 우리 손주 이후의 세대는 엄마 성을 따르는 것이 지금처럼 특별히 이상한 시대는 아닐 것입니다.” 김선경·준영 모녀를 11월 8일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김준영 “나부터 엄마 성을 따르겠다”
“엄마 성을 쓰는 사람은 적은데, 아이가 따돌림 당하면 어떡해?”, “아이가 엄마 성을 따르고 싶다고 한 게 아닌데 마음대로 해도 돼?” “남편이 싫어하지 않아? 시부모님은 어떡하고?” 그림책 작가인 준영씨가 아이에게 자신의 성을 주고 싶다고 하자 다들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 시가, 남편 걱정을 했다. 준영씨를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과도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없었다.
2008년 호주제 폐지 이후 혼인신고서에 엄마의 성을 쓸 수 있는 조항이 추가됐다. “자녀의 성·본을 모의 성·본으로 하는 협의를 하였습니까?”라는 문장에 ‘예’나 ‘아니오’로 표시할 수 있다. 엄마 성을 주기 위해선 ‘예’ 항목에 체크해야 한다. 준영씨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혼인신고하던 날 구청 직원에게 “아직 아이에게 엄마 성을 줄지 아빠 성을 줄지 결정하지 못했다”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구청 직원은 “나중에 정정할 수 있다”고 잘못 안내했다. 대신 구청 직원은 ‘협의서’가 필요하다고 했다. 협의서가 필요한지 몰랐던 준영씨는 구청에 양식이 있느냐고 물었다. 구청 직원은 양식은 따로 없고 알아서 준비해와야 한다고 했다. 전세자금 대출 기한 때문에 혼인신고 당일 서류를 제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협의서를 준비하지 못했고 나중에 정정할 수 있다는 말에 준영씨 부부는 ‘해당란’에 ‘아니오’라고 체크하고 혼인신고를 마쳤다.
구청 직원 말처럼 ‘정정’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혼인신고 때 ‘예’라고 체크하지 못하면 현재로선 엄마 성을 쓸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준영씨는 2020년 5월부터 대한법률구조공단 등에 혼인신고 때 잘못 안내했던 구청 직원의 증언이 있으면 정정이 가능한지, 출생 이후 아이 성·본 변경이 가능한지, 아이의 성을 새로운 성으로 창설하는 것은 가능한지 본격적으로 알아봤지만 가능한 선택지가 없었다.
남은 방법은 ‘이혼 후 혼인신고를 다시 하는 것’ 뿐이었다. 준영씨는 그해 11월 구청들에 이혼 후 혼인신고를 다시 하는 방법을 알아봤다. 제대로 아는 구청 직원은 많지 않았다. 협의서가 필요한지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한 구청 직원은 혼인신고서에 체크를 못해서 이혼을 하는 거냐면서 법원에 정정 신청이 가능한데 제대로 알아본 거 맞느냐고 오히려 되물었다. 헌법소원을 하는 방법도 있다는 조언도 들었지만 혼자 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일로 느껴졌다.
준영씨는 자신부터 엄마 성을 따르기로 마음 먹었다. ‘기본값’은 부성인 세상에서 엄마 성을 쓰는 사람을 한 명이라도 늘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법이 부성 우선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니 벽이 매우 단단하게 느껴졌다”며 “엄마 성을 쓰는 경우가 조금이라도 덜 특수한 상황이 되도록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즈음 준영씨는 모의 성·본을 따르는 사람들을 모으는 프로젝트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혼자 법원에 가서 성·본 변경 청구를 하면 받아들여지기 어렵겠지만 여럿이 모이면 법원이 조금 더 움직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김선경 “‘우리 집안은 원래 그래’ 말해주겠다”
준영씨가 엄마 성을 따르기 위해서는 아버지 동의를 받아야했다. 아버지는 “네가 원한다면 네 성을 바꾸는 것은 원하는 대로 하라”고 동의서를 써주셨다. 2020년 8월 아버지 환갑 축하를 하던 날 준영씨는 동의서를 받으며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어머니 선경씨가 “나부터 엄마 성을 쓰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처음 선경씨는 딸이 손주에게 자신의 성을 주고 싶다기에 ‘성이 뭐기에 저러나’라며 딸이 편하게 갈 수 있는 길을 너무 힘들게 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터넷으로 성·본 변경에 대해 검색해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아이에게 엄마 성을 주더라도) 한 세대만 올라가면 아빠 성인데 무슨 의미냐’는 글이 많았다. 보다보니 울컥했다. 선경씨는 “그럼 한 대(세대)는 내가 해주겠다. 적어도 내 딸은 그런 말을 듣지 않게 하겠다”라고 결심했다.
선경씨는 손주에게 “우리 집은 원래 그래”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제가 제 엄마의 성을 따르게 되면 제 손주는 엄마의 엄마의 엄마의 성을 따랐다고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럼 아이가 훨씬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고 사람들도 할 말이 없지 않을까요. 심적인 지지 외에 제가 딸에게 실질적으로 줄 수 있는 도움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2022년 10월 선경씨는 대구가정법원 안동지원에 ‘성·본 변경 청구서’를 제출했다. 청구서에는 “우리 손주 이후의 세대는 모의 성을 따르는 것이 지금처럼 특별히 이상한 시대는 아닐 것이다. 이에 저 또한 어머니의 성을 따름으로써 윗세대 어른으로 좋은 본을 보이고자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기각은 빨랐다. 한 달여만인 11월 결과가 나왔다. 민법 제781조 제6항은 “자(자녀)의 복리를 위하여 자의 성과 본을 변경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부, 모 또는 자의 청구에 의하여 법원의 허가를 받아 이를 변경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대구가정법원 안동지원 재판부는 “민법에서 정한 ‘자의 복리를 위하여 자의 성과 본을 변경할 필요가 있을 때’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자의 나이와 성숙도, 현재의 가족상황, 변경 신청의 동기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야 한다”며 “이 사건에서는 사건 본인의 복리를 위하여 성·본을 변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법원은 “어른으로 좋은 본을 보이고자 한다”는 선경씨의 청구 취지를 ‘본인의 복리를 위해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선경씨는 “예상했던 일”이라고 답했다. 준영씨는 “법원에서 저희 어머니의 동기를 조금만 더 살펴서 종합적으로 판단해주셨다면 좋았을텐데 아쉬웠다”고 말했다. 현재 성·본 변경 허가는 보통 재혼 가정에서 계부나 양부의 성을 따르거나, 이혼·사별 후 엄마가 혼자 자녀를 양육하는 가정에 대해 이뤄지고 있다.
사근사근하지 않았던 모녀, 같은 길을 갑니다
“내 성을 물려주고 싶다”는 얘기에 준영씨의 편에 서 준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준영씨는 “제가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이 저한테 툭툭 던지는 말들이 상처가 됐다”고 말했다. 선경씨도 처음엔 딸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 악플에 시달리다 사망한 여성 연예인들의 소식을 들었다. 그는 “(악플이) 틀린 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며 “딸은 틀리지도 않았지만 공격에 직면할 수 있을텐데 딸은 혼자 두지 않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나는 엄마고, 내 아이는 내가 지킨다고 생각했어요.”
원래 두 사람이 ‘사근사근한 모녀 사이’는 아니었다. 선경씨는 준영씨를 독립적으로 키웠고 늘 자식들과 거리를 두려 했다. 2021년 여름 두 사람이 법률상담소에 무료 상담을 받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날 상담소의 여성 변호사는 ‘굳이 이렇게 할 필요가 있느냐’고 물었다. 변호사의 무심한 대처에 선경씨는 당황했고 준영씨는 상처를 받았다.
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 준영씨는 문득 “엄마 나랑 이렇게 같이 와주고 성 바꾼다고 해줘서 고마워”라고 말했다. 선경씨는 어색해서 “야, 너 별로 고맙지도 않지. 왜 그래?”라고 답했는데 준영씨가 서러움이 복받쳐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아니야, 나 진짜 고맙다고, 지금 나한테 엄마밖에 없다고.” 선경씨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간 마음고생을 많이 했구나. 정말 옆에 서 있어야겠다. 나만이라도 딸을 안아줘야겠다.’
준영씨에게 엄마는 “내가 틀리지 않았다고 온몸으로 증명해주는 사람”이다. “자꾸만 내가 틀린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엄마가 그게 아니라고 말해줬어요. 엄마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내가 너 외롭지 않게 너랑 똑같이 한 번 살아볼게’ 해주신 거잖아요. 저도 언젠가 엄마처럼 누군가를 돕는 여자가 되고 싶습니다.”
https://www.khan.co.kr/national/gender/article/202312181631011
https://www.khan.co.kr/national/court-law/article/202312181630031
임아영 젠더데스크 laykn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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