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전쟁, 강감찬 이전에 이 명장들 있었다
실제 역사 속 행적 살펴보니
한국방송(KBS)에서 방영중인 대하 사극 ‘고려거란전쟁’이 오랜 만에 돌아온 정통 사극을 반기는 시청자들의 사랑을 꾸준히 받고 있다. 천추태후와 목종의 갈등, 강조의 반란, 거란의 침공 등 고려 현종 재위 초기 혼란상을 속도감 있게 그려내며 드라마 초반부터 호평이 나온다. 고려사에 대한 관심과 함께 거란에 맞선 장수들도 재조명되고 있다.
특히 ‘귀주대첩’(3차 고려거란전쟁·1019년)으로 유명한 강감찬 장군 이전에 ‘2차 고려거란전쟁’(1010년)에서 거란군을 괴롭히며 이름을 떨친 장수들의 활약상이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유튜브에도 이들의 행적을 소개하는 콘텐츠들이 속속 올라오며 화제가 되고 있다.
수십만 거란 대군에 맞서 성을 지키고 이후 포로로 끌려간 고려 백성들을 구한 양규(배우 지승현)와 김숙흥(배우 주연우), 거란을 피해 몽진(임금이 난리를 만나 궁궐 밖으로 몸을 피함)한 고려 황제 현종을 끝까지 호위한 지채문(배우 한재영) 등은 실제 역사 속에서도 고려를 지켜낸 명장들이었다. 이들의 활약은 고려가 거란에 굴복하지 않고 이후 전성기를 열어젖히는 데 디딤돌이 된다.
손에 피가 철철 나도록 활시위 당긴 양규
거란군 40만 대군에 맞서 흥화진(현 평안북도 의주군으로 추정) 성에서 7일 동안 전투하며 적을 물리치는 고려 서북면 도순검사 양규의 활약상은 드라마 초반부의 하이라이트다. 거란군의 화살이 빽빽하게 꽂힌 성벽 사이에서 눈붙일 틈 없이 활시위를 당기는 양규의 손에 피가 철철 흐르고 피딱지가 내려앉은 장면은 처절했던 전투를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드라마적 상상력이 가미된 장면이겠지만, 실제 역사에서도 양규의 활약은 대단했다.
‘고려사’ 양규 열전에는 ‘거란 침략군의 항복 권유를 거부하고 흥화진을 굳게 지키다’라고 기록돼있다. 거란의 침략에 당시 고려는 강조를 행영도통사로 임명하고 주력군 30만명을 주어 통주(평안북도 선천군으로 추정)에서 맞서게 했다. 그러나 총사령관 격인 강조는 초반 몇 번의 승리 이후 대패해 거란에 사로잡혀 죽는다.
고려사를 보면 거란군은 강조의 편지를 위조해 양규에게 보내 항복을 권했지만, 양규는 “‘나는 왕명을 받고 왔지, 강조의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항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군 지휘관이 전사하고 주력군이 대패했는데도 굴하지 않은 것이다.
‘고려사절요’를 보면 거란의 항복 권유에 “성안이 모두 두려워 하였”지만, 양규의 꺾이지 않는 의지에 “더불어 성문을 닫아걸고 굳게 지키자 사람들의 마음이 곧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거란군은 끝내 흥화진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뒤통수에 적을 둔 채 서경(평양)으로 남하한다.
고려인 포로 3만명을 되찾은 양규와 김숙흥
양규의 활약은 이후 더 눈부시다. 17일 방영된 12회에서 양규는 김숙흥과 함께 거란군 6000명이 지키던 곽주성(평안북도 곽산군 추정)을 탈환한다. 거란이 개경(개성)까지 진격해 고려 깊숙이 내려간 상황에서 후방 거점을 타격해 승리를 거둔 것이다.
드라마에서 거란 황제는 “6천이 지키려는 성을 함락시키려면 최소한 6만이 필요한 법이요. 지금 고려군이 건재하단 말이오”라고 한다. 곽주 탈환은 거란의 퇴로를 사실상 막은 것으로 거란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양규와 김숙흥이 이끌고 간 군사는 6만명이 아니라 1700명이었다. 고려사는 “양규가 흥화진에서 군사 700여명을 이끌고 통주까지 와서 흩어진 군사 1000명을 수습하였다. 밤중에 곽주로 들어가 잔류한 거란 병사들을 습격하여 모조리 목을 베었으며, 성안에 있던 남녀 7000여명을 통주로 옮겼다”고 기록한다.
이후 양규와 김숙흥은 게릴라전을 벌이며 거란을 괴롭혔고 거란이 포로로 끌고 간 고려 백성 3만여명을 구한다. 고려사는 “양규는 고립된 군사들과 한 달 동안 모두 일곱 번 싸워 죽인 적군이 매우 많았고, 포로가 되었던 30000여구(口)를 되찾았으며, 노획한 낙타·말·병장기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 당시 거란이 고려 백성을 끌고 가 노예로 부려먹으며 전쟁을 이어갔는데 두 장군의 활약은 고려인을 구한 것과 동시에 거란에 타격을 준 것이다. (이들의 마지막은 고려사에서 “종일 힘써 싸웠지만, 병사들이 죽고 화살도 다 떨어져 모두 진중에서 전사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현종이 양규와 김숙흥 사후에 이들과 가족들에게 포상을 내리며 전한 말은 당시 고려에서 이들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양규
“그대의 남편은 재능이 장군으로서의 지략을 갖추었고, 겸하여 정치의 방법도 알고 있었다. 항상 송균(松筠)과 같은 절개를 지키다가 끝까지 나라에 충성을 다하였고, 그 충정은 비길 데가 없을 정도로 밤낮으로 헌신하였다. 지난번 북쪽 국경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중군(中軍)에서 용맹을 떨치며 군사들을 지휘하니, 그 위세로 전쟁에서 이겼고, 원수들을 추격하여 사로잡아 있는 힘을 다해 나라의 강역을 안정시켰다. 한 번 칼을 뽑으면 만인이 다투어 도망가고, 6균(鈞)의 활을 당기면 모든 군대가 항복하였으니, 이로써 성(城)과 진(鎭)이 보존될 수 있었으며, 군사들의 마음은 더욱 굳건해져 여러 차례 승리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전사하였도다.”
*김숙흥
“증직 장군 김숙흥은 변방의 성을 지킬 때부터 적을 무찌르고자 나갈 정도로 용맹스러워 이미 파죽지세로 전공을 세웠으나, 복병의 화살에 맞아 끝내 목숨을 잃었다. 지난 공로를 기념하여 마땅히 후한 상을 더하고자 한다. 해마다 그의 모친에게 곡식 50석을 지급하되, 평생토록 할 것이다.”
-‘고려사’ 양규 열전 중에서
현종 피난길 끝까지 지킨 ‘호위무사’ 지채문
“제가 비록 둔하고 겁이 많으나, 원하옵건대 곁에 있으면서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겠습니다.” (고려사 지채문열전)
드라마 속에서 낭아봉(머리부분에 못 같은 가시가 밖힌 곤봉)을 휘두르며 거란군을 물리치는 지채문 중랑장은 모두가 무력을 인정하는 맹장으로 그려진다. ‘삼국지연의’의 맹장 장비를 연상하게 한다. 그는 피난길에 오른 현종을 끝까지 호위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고려는 지방 호족들의 권세가 강했고 현종은 피난길에 수시로 호족 세력의 위협에 죽을 고비를 넘겼다. 고려사, 고려사절요를 보면 지채문은 이들의 위협을 매번 물리치고 황제를 구했다. 기록을 보면 그의 주무기는 ‘활’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적성현(積城縣) 단조역(丹棗驛)에 이르자 무졸(武卒)인 견영(堅英)이 역인(驛人)들과 함께 활시위를 당겨 장차 행궁을 범하려고 하니, 지채문이 말을 몰면서 활을 쏘았다. 적도가 달아나 흩어졌다가 다시 서남쪽의 산으로부터 갑자기 튀어나와 길을 막자 지채문은 또다시 활을 쏘아 그들을 물리쳤다.
-‘고려사절요’ 중에서
고려사절요 1011년 1월(음력)에 ‘유종과 김응인이 왕을 속이고 달아났으나, 지채문은 성심껏 왕을 보필하다’ 대목을 보면 지채문은 “이러한 신하가 있는데 어찌 도적을 염려하십니까”라고 현종을 안심시켰다고 기록돼 있다.
이후 현종은 지채문에게 토지를 상으로 내리며 “짐이 도적을 피하다가 먼 길 위에서 곤경에 빠졌을 적에 호종하던(따라가던) 신료들 모두 도망가 흩어지지 않은 자가 없었는데, 오직 지채문만이 바람과 서리를 무릅쓴 채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면서 말고삐를 잡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끝까지 소나무나 대나무 같은 절개를 지켰다. 특출한 공로를 생각하면 어찌 남다른 은전(恩典)을 아끼겠는가”라고 교서를 내렸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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