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에 밀린 건 엑스포만이 아니다[이미숙의 시론]
사우디 원전 연료시설 허용 美
韓엔 핵확산 우려론 펴며 반대
核보유론은 확장억제로 눌러
미국의 한국·사우디 이중 잣대
빈 살만 같은 집요한 협상으로
북핵에 맞설 핵 능력 확보해야
대한민국이 2030 부산 엑스포 유치전에서 중동의 사우디아라비아에 큰 표차로 패배한 것은 충격적이다. 2차 투표에서 20여 표 차이로 승리한다는 대통령실 관계자의 장담이 있었기에 더 그렇다. 올해 사우디에 밀린 것은 엑스포만이 아니다. 미국을 상대로 한 핵 외교에서도 사우디는 원자력발전소 연료인 우라늄농축시설을 사실상 얻어냈다. 한국이 우라늄 농축을 제기할 때마다 뜯어말렸던 미국은 사우디가 이스라엘과의 수교 조건으로 핵연료 시설을 내걸고 버티자 들어줬다. 엑스포 유치 실패는 사우디의 오일 머니 때문이라고 핑계라도 댈 수 있지만, 후자는 명백한 외교적 패배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월 외교·국방부 업무보고에서 “북핵이 심각해지면 자체 핵을 보유할 수 있다”고 했을 때 미국엔 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워싱턴의 압박 탓인지 대통령실은 이내 “핵 보유 추진 뜻이라기보다 국제사회에 북핵의 심각성을 환기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수위를 낮췄다. 10여 일 후 윤 대통령은 월스트리트저널(WSJ) 인터뷰에서 “현재로서는 우리가 핵확산금지조약(NPT)체제를 존중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것”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의 발언 후퇴(dial back)”라고 WSJ가 평했을 정도로 톤을 확 낮췄다.
한미 양국은 4월 한미 정상회담 때 ‘워싱턴선언’을 발표했는데, 당시 외교부는 ‘미국이 핵을 포함한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한국을 지원한다’는 것을 약속한 문건으로 기존의 확장억제가 한층 더 강화됐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정상회담 직전 백악관 고위 인사는 백그라운드 브리핑에서 “한국이 자체 핵 개발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확장억제 강화 조건으로 한국이 핵 개발 포기 의사를 밝힌 게 이 선언의 핵심이란 얘기다.
미국은 윤 대통령의 자체 핵 개발 의지를 외교적 압박과 확장억제 강화란 당근과 채찍으로 주저앉힌 반면, 사우디의 실권자 무함마드 빈 살만(MBS)의 우라늄농축시설 요구는 수용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한국과 권위주의 왕정국가인 사우디의 외교 상황을 단순 비교하기는 힘든 게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제대로 된 협상을 시도조차 않은 채 백기를 든 것과 달리 사우디는 핵 강국의 꿈을 성사시키기 위해 수년에 걸쳐 집요하게 밀어붙여 관철시켰다.
물론, 미국 측 인사들은 사우디에 들어설 우라늄농축시설은 100% 미국 기술로 지어지고 통제도 미국이 완벽하게 할 것이라고 얘기한다. 사우디 땅에 지어질 뿐 미국에 의해 운용되는 농축시설이라는 얘기인데 그럴듯한 해명일 뿐 설득력은 없다. 핵무기 비확산은 세계 평화를 위해 지켜야 할 원칙이지만, 이스라엘-사우디 수교가 미국의 중동 전략에 중요하니 빈 살만의 요구를 예외적으로 수용하겠다는 편의적 발상이다.
미국은 늘 그랬다. 핵 비확산을 절대불변의 원칙처럼 강조하다가도 언제든 상황에 따라 입장을 바꿨다. 핵무기를 개발한 인도와 원자력협정을 맺었고, 중국 지원으로 핵실험을 한 파키스탄에 대해서도 제재를 하다 아프가니스탄 침공 후 도움이 필요하자 슬그머니 풀었다. 최근 트랜스퍼시픽다이얼로그(TPD) 회의 때 필자가 ‘워싱턴 비확산 진영의 구루’로 통하는 로버트 아인혼에게 “미국이 한국의 우라늄 농축에 반대하면서 사우디에 농축시설을 제공하는 것은 이중잣대(double standard)가 아니냐”고 물었다. 그는 즉답을 피한 채 “하마스의 이스라엘 테러 후 사우디 프로젝트가 현실화할 가능성이 낮아졌다”고 했다. 또, “사우디에 농축시설이 만들어지면 한국에도 반대할 명분이 약해질 것”이라고만 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미국에서 북핵 위협 감소를 앞세우는 논객이 부쩍 많아졌다. 핵 감축 대가로 대북 제재를 완화하자는 얘기로, 북한과 군축협상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의 핵 능력을 저지해온 미국이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대우하는 것은 동맹의 배신이다. 윤 대통령이 연초 독자 핵 보유 의지를 밝힌 것은 의미가 있지만, 빈 살만식(式) 협상 한 번 하지 않은 채 ‘핵우산 신뢰’로 돌아선 것은 유감스럽다. 미국과 얼굴 붉히며 협상을 해본 경험이 없는 인사들이 대통령 귀를 막고 있는 탓일까? 사우디에 번번이 밀린 해를 보내며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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