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 갔던 깡시골 청년 “누구나 ‘사잇 사람’ 된다”

2023. 12. 18.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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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 전인 1941년, 충북 진천에서 태어난 '깡시골' 출신 작가 임충섭은 서른두 살이 되던 해 고향을 떠나 미국 뉴욕으로 이주했다.

그는 동양과 서양, 자연과 문명, 과거와 현재, 그 충격적인 간극 틈에서 자기 자신이 되려고 애썼다.

자연과 문명을 가로지르는 경계선이면서 동시에 그 둘 사이에 다리를 놓고 연결하고 싶은 작가의 욕망이 담겼다.

서양의 현대미술과 동양의 서예 사이에서 독창적인 조형 언어를 드러낸 1980년대 중반부터 그의 작품 세계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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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현대, 작가 임충섭 40년 ‘획’ 전시
동서양, 자연·문명 연결 사잇 존재 탐구
작가 임충섭

82년 전인 1941년, 충북 진천에서 태어난 ‘깡시골’ 출신 작가 임충섭은 서른두 살이 되던 해 고향을 떠나 미국 뉴욕으로 이주했다. 그는 동양과 서양, 자연과 문명, 과거와 현재, 그 충격적인 간극 틈에서 자기 자신이 되려고 애썼다. 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허드슨강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매일매일 낯설고 생경한 장면이 펼쳐졌다. 그의 기억은 더욱 강력하게 어머니 품 같은 고향 땅으로 향했다.

“나는 ‘사잇’ 존재입니다.” 최근 만난 그가 툭 던지듯 내뱉은 한 마디. 사잇은 ‘사이’와 ‘잇다’를 결합한 단어다. 그의 작품 세계를 함축하는 핵심 키워드이자, 그의 영원한 정체성이다. 자연과 문명을 가로지르는 경계선이면서 동시에 그 둘 사이에 다리를 놓고 연결하고 싶은 작가의 욕망이 담겼다.

개인전 ‘획(劃)’ 전시 전경 [갤러리현대 제공]

14일부터 서울 종로구 삼청로 갤러리현대에선 임충섭의 개인전 ‘획(劃)’이 열리고 있다. 그의 40여년간을 망라한 작품 40여점이 전시되고 있다. 서양의 현대미술과 동양의 서예 사이에서 독창적인 조형 언어를 드러낸 1980년대 중반부터 그의 작품 세계가 펼쳐진다. 둥근 캔버스부터 드로잉, 고부조, 아상블라주, 영상과 결합된 키네틱 설치 작품까지 장르와 매체도 가리지 않는다. 전시는 내년 1월 21일까지.

“동양 서예의 획은 우리의 중요한 미학적 근원입니다. 우리의 조형 미학은 획으로의 출발인 것이죠.”

임충섭에게 획은 동양 철학에서 말하는 ‘기(氣)’와도 연결된다. 동양의 여백과 서양의 수직성이 어우러지는 화면 속에서 획은 조형적 힘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 속에서 발견되는 획은 평면과 입체를 오가기도,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허물기도, 되려 여백을 보여주기도 한다. 구분하기 위한 단순한 선이 아니라는 의미다.

전시장 1층에 들어서면, 부족 마을의 입구를 지키는 토템처럼 두 작품 ‘수직선 상의 동양문자’와 ‘하얀 한글’이 나란히 걸려 있다. 더는 사각형 캔버스를 쓰지 않겠다는 작가가 밤새워 만든, 제멋대로의 둥근 캔버스가 특히 눈길을 끈다. 빌딩을 상징하는 수직선 사이로 한자들이 빼곡히 적힌 ‘수직선 상의 동양 문자’와 달리, ‘하얀 한글’에는 흰 여백들 사이에서 한글의 자음과 모음이 미니멀하게 그려졌다.

“모든 사물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에 영감을 받은 임충섭은 허드슨강 산책길에서 만난 버려진 자전거 안장, 녹이 슨 철 고리, 끊어진 운동화 끈, 깃털, 나뭇가지 등을 작업실로 가져와 채색해 새롭게 나열하기도 했다. 저마다 다른 역사를 가진 공산품과 자연의 부산물이 각기 충돌하면서도 어우러지는 장면이 이색적이다.

실제 그의 마음속에 내재한 자연에 대한 기억은 자연과 뚜렷이 구분된 도시 문명과의 우발적 만남에서 튀어나왔다. 그가 길거리에서 수집한 오브제가 작가 자신에게 획, 그 자체였을 것으로 추론되는 이유다. ‘길거리에서 버려진 오브제를 가져오는 기준이 있느냐’는 질문에 임충섭은 “따로 없다. 그런데 마음을 파내는 과정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사잇 존재로서 작가의 마음 속 기억이 선명하게 드러난 키네틱 설치 작품 ‘길쌈’도 눈에 띈다. 천을 짜는 베틀이 수직적으로 형상화된 작품이 서 있다. 그런데 작품 바닥에는 허드슨강이 흐르는 영상이 재생된다. 수평적인 강물에 비친 밝은 달은 동양을 의미한다. 불완전한 현실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상기시키는 작품 앞에서 어쩌면 우리 모두가 사잇 존재가 아닌지, 떠올리게 만드는 대목이다.

이정아 기자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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