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전쟁사극 열풍...빌런의 시간도 빛났다

2023. 12. 18.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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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고려거란전쟁’·‘노량’ 속 적장들 눈길
과거보다 구체적인 캐릭터로 긴장감 선사
단순한 악인 넘어 입체적 서사 이해 도와
영화 ‘노량’에서 백윤식이 분한 왜장 시마즈 요시히로(가운데)

전쟁역사극이 돌아왔다. 병자호란 전쟁 포로 이야기를 다뤘던 드라마 ‘연인’이 시청률 12.9%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 가운데, 전통사극을 자처한 고려거란전쟁은 벌써 두자릿 수 시청률을 기록하며 순항 중이다. 연말에는 대표적인 구국의 영웅 이순신 3부작의 피날레인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이하 노량)’가 1000만 관객을 기대하고 있다.

이처럼 전쟁역사극이 대중의 호응을 받는 것은 보다 치밀해진 스토리 라인 덕이다. ‘역사책’이 스포일러(?)인 전쟁역사극에서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인물은 바로 영웅의 대척점에 선 적장들. 일명 빌런으로 불리는 이들에게 최근 역사극들은 촘촘한 서사를 덧입혀 쫄깃한 긴장감을 선사한다. 결론을 이미 알고 있어도 가슴을 졸이며 극에 집중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이 같은 사극 트렌드는 과거와 사뭇 다른 모습이다. 과거에는 고려나 조선 조정에서 적의 침입에 대한 준비를 소홀히 하고, 적의 공격이 임박해지면 소모적인 논쟁을 펼치다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는, 이른바 평면적인 구성이 많았다. 전쟁에 나온 적장들 역시 단순히 악인으로 처리하곤 했다.

하지만 최근 전쟁사극들은 당시의 대내외적 관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특히 적장에 대해선 캐릭터의 특성을 잘 살려 좀 더 구조적이고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서사를 입힌다.

실제로 20일 개봉하는 영화 노량에서는 전작인 ‘명량’과 ‘한산: 용의 출현’에 비해 극중 적장의 분량이 상당히 늘어난다. ‘명량’의 적장인 구루시마 미치후사(류승룡 분)는 1597년에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의 노련한 지휘와 울돌목의 물살 변화를 읽지 못해 격파 당한 후에 참수 당하는 것으로 끝난다.

‘한산’에서 적장인 와키자카 야스하루(변요한 분)부터는 분량이 제법 늘어난다. 역사에서 와키자키는 한산도 해전에서 조선군에 대패한 이후, 인근 무인도 섬에서 미역 등 해초로 연명해 겨우 일본으로 돌아간다. 그후 일본에서 벌어진 세키가와라전투(동서합전)에서도 원래 서군 소속이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으로 옮겨 살아난다. 임진왜란에서는 육군과 수군으로 두루 활약했지만, 영화에선 이런 상황들을 상세하게 다루지는 않았다.

하지만 ‘노량’에서는 적장의 비중이 매우 커졌다. 이순신 장군(김윤식 분)과 대립각을 세우는 왜의 장수 시마즈 요시히로(백윤식 분)는 극중에서 이순신 장군 다음으로 비중이 크다.

올해 76세인 배우 백윤식은 극중에서 백발에 흰 수염이 인상적인 사천왜성 총대장 시마즈 역을 맡아 서슬 퍼른 카리스마를 선보인다. 백윤식은 시마즈 역에 대해 “정석으로 풀어나가는 정공법으로 연기한다”면서 캐릭터 독해와 표현법을 밝혔다.

역사적으로 볼 때 임진왜란의 일본측 선봉 장수는 고시니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다. 시마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압력 때문에 참전했다. 이에 ‘노량’에서는 마무리 투수 격으로 나온다. 영화는 도요토미의 죽음으로 일본군이 퇴각하면서 시작하는데, 시마즈는 살마군을 이끌고 고니시(이무생 분)군을 도와 조선에서 퇴각하려고 하지만 이순신과 명나라 장수 진린이 이끄는 조명연합수군과의 노량해전에게 처참하게 패한다.

영화 ‘노량’에서는 시마즈의 서사를 역사책 만큼 다루진 않지만, 순천왜교성에 주둔해 있던 고니시 장군과의 관계 속에 “이순신을 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나를) 무시 못해”라는 편지를 읽고 순천을 향해 출정한다. 시마즈에 서사를 드러내면서 캐릭터를 더욱 입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외에도 고니시 장군과 시마즈의 끈끈한 가신인 쵸주인 모리아츠(박명훈 분), 고니시의 부하 아리마 하리노부(이규형 분) 등 다양한 왜군 캐릭터들이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다.

왜군 뿐 아니라 명나라 장수들도 빌런처럼 나온다. 명은 조선의 동맹국이긴 하지만, 왜의 철군을 돕는 등 ‘완벽한 우리 편’이라고 보기 어려운 나라다. 명분과 실리를 모두 거머쥐려고 이순신에게 전쟁을 끝내자고 설득하는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정재영 분)과 부도독 등자룡(허준호 분)의 등장은 당시 동북아 정세 및 이순신 장군이 처한 상황이 복잡다단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극중에서 진린은 처음에는 조명 연합에 방해가 되는 찌질한 존재였다가 이순신 장군에 감동을 받아 성장하는 복합적인 캐릭터로 나온다. 70세의 나이로 참전한 노병사인 등자룡은 이순신 장군의 판옥선을 타고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는데, 그의 서사 덕분에 적장이 등자룡의 수급을 들고 있는 장면에서 눈물을 훔치는 관객들이 많아질 것 같다.

KBS 사극 ‘고려거란전쟁’의 소배압

요즘 상승세를 타고 있는 KBS 사극 ‘고려거란전쟁’에서도 고려의 상대국인 거란의 서사 비중이 꽤나 크다. 거란 6대 황제 성종인 야율융서(김혁 분)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급한 성미가 잘 드러내며 왜 고려를 침략하게 됐는지 이해를 돕는다.

이와 함께 젊은 패기를 지닌 황제의 성미를 누그러뜨리며 오랜 경험으로 전장과 상대를 냉정하게 꿰뚫고 있는 소배압(김준배 분), 흥화진 전투의 대장으로 실적 쌓기에만 급급한 선봉도통 야율분노(이상홍 분) 등 다양한 적장 캐릭터가 눈에 띈다. 이를 보면 ‘전쟁 초보’이자 ‘서툰 황제’ 현종(김동준 분)과 문무를 겸비하며 현종을 보좌하는 ‘늦깎이 신하’ 강감찬(최수종 분)의 멘토링이라는 고려의 속사정 만큼 적장들 간 캐릭터 관계도 촘촘함을 알 수 있다

드라마에서 다루지는 않지만, 거란의 1차 침입 때는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했지만 패배했다. 이후 서희와의 외교 담판에서 강동 6주를 고려에 넘겨야 했다. 소손녕은 소배압의 친동생이다. 형제는 용감했지만, 그들에게 고려는 악몽이었다.

MBC 사극 ‘연인’의 용골대

MBC 사극 ‘연인’은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김준원 분)를 비롯해 청나라 장수 용골대(최영우 분), 섭정왕 도르곤 등을 등장시켜 캐릭터를 세세하게 나눴다. 용골대는 조선의 웬만한 신하보다도 존재감이 컸다. 만주어로 노래까지 했으니, 적장이 이렇게 분량이 많기도 어려울 것 같다.

홍타이지는 우리에게는 악인이자 적국의 황제지만, 완벽하고 세심한 리더십을 선보여 시대극의 서사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홍타이지는 죽기 직전 딸인 청나라 공주 각화(이청아 분)에게 “(명과의 전쟁에서) 승전이라고 하나 부하를 많이 잃었어. 아직 산해관을 차지하지도 못했어. 그래서 인심을 잃어선 안돼. (조선)포로를 학대하는 일로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포로를 가혹하게 대하면 인심을 잃는다”고 말하고 죽는다.

‘노량’에서 이순신 역을 맡은 김윤석은 “덩케르크가 수 십편의 영화가 되어 나오듯, 이순신도 앞으로 나보다 더 뛰어난 연기자와 또 다른 감독님이 이어갔으면 한다”고 말해 사극에서 캐릭터가 다양하게 해석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익주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는 “사극에서 전쟁이나 교류를 다룰 때 상대국의 인물을 단순하게 다루는 건 편협하다”며 “1882년 조미수호조약의 미국 측 대표인 슈펠트 제독이 열강 중에서는 그나마 덜 불평등한 조항이었던 거중조정 항목을 넣었다는 점, 나중에 미국이 이를 어겼지만, 조선의 상대국 인물들도 좀 더 상세히 알려주면 당시 상황을 입체적으로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서병기 선임기자

wp@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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