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권이면 관광한다..과거시험 답안지와 여행[함영훈의 멋·맛·쉼]
한국국학진흥원, 가장 오래된 답안 발견
성삼문,신숙주,박팽년의 동기 정종소 것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압권(壓卷)하면 관광(觀光)한다.
압권은 다른 서류나 책의 맨 뒤에 놓여 다른 것들을 누르는 최고 수작(秀作)을 뜻하고, 관광은 나라의 성덕(盛德)과 광휘(光輝), 즉 임금의 용안을 본다는 뜻이다.
고려, 조선의 과거시험에 합격하면, 압권의 시험지가 임금 앞 테이블 맨 위에 놓이고, 급제한 선비들은 용안을 알현할 기회를 얻게 된다. 그래서 압권에 성공하면 관광을 하는 것이다.
과거시험을 보러 고향을 떠나는 선비들은 “관광하고 오겠습니다”라고 당찬 각오를 밝힌다.
그러나 경쟁률, 즉 응시자 대비 급제자의 비율은 1만 대 1에 육박한다. 전국 각지의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가는 길은 산과 계곡, 호수를 지나는 험난한 길이다. 그곳의 경치는 왜 그리 좋은지. 과거시험 보러 가는 길의 중요 고비인 괴산과 문경은 멋진 풍광을 자랑한다. 임금의 성덕과 광휘가 부럽지 않다.
절대다수의 낙방자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관광하고 왔습니다”라고 말한다. 멋진 풍광을 보고 왔다는 말이 된다. 오늘날 여행과 동의어 처럼 쓰이는 관광은 이렇게, 과거시험과 연관을 맺게 된다.
종이는 수요에 비해 늘 공급이 적었기에 다양하게 재활용됐고, 과거시험 답안지들 역시 다양한 방법으로 인멸,폐기되고 새 종이로 거듭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몇몇 장이 남아있었는데, 최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과거시험 답안지가 발견됐다. 제대로 ‘관광’을 한 답안지였기에 소중하게 간직되었던 것이다.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은 조선 세종대인 1447년(세종 29)의 문과 중시 시권의 원본 2건을 온전한 형태로 발견했다고 18일 밝혔다.
임진왜란 이전의 문과 시권은 현재까지 그 사례가 12건밖에 확인되지 않을 정도로 희소성이 높은 자료이다. 그동안 알려진 가장 이른 시기의 문과 시권은 보물로 지정된 1507년(중종 2) 충재 권벌(1478~1548)이 작성한 문과 전시(殿試) 시권이다. 이번에 발견한 시권은 이보다 60년 앞선 것으로, 시권 원본을 온전한 형태로 발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시권의 주인공은 세종대 문신 정종소(鄭從韶)이다. 본관은 영일이며, 증조대인 고려말 경상도 영천에 입향하였다. 부친 정문예는 포은 정몽주와 팔촌 사이였다. 정종소는 다섯 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이 중 3명이나 문과에 급제할 정도로 당대에 큰 명성을 얻은 집안이었다.
정종소의 후손 호수 정세아(湖叟 鄭世雅)로 임진왜란 당시 큰 공을 세운 의병이다. 이번 시권은 정세아의 집안인 경북 영천 영일정씨 호수종택이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한 자료이다.
정종소는 1447년(세종 29) 문과 중시에 응시하여 을과 삼등 제1인으로 급제하였다. 당시 동기생은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정창손 등 당대 명망 있는 인사들이다.
이들 문집에도 당시 과거시험의 답안 내용이 수록되어 있지만, 실물이 남아 있는 경우는 없다. 한국국학진흥원에 소장된 정종소 문과 시권은 보존상태도 매우 양호하여서 내용을 파악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다.
이 자료는 그간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15세기 문과 중시의 유일한 실물 사례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특히 당시 시권의 형태적 특징을 분석할 수 있는 중요한 원본 자료로서도 의미가 있다.
해당 자료는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성호 교수가 한국국학진흥원 자료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발견하였고, 내용을 치밀하게 분석하여 한국국학진흥원 등재학술지 ‘국학연구’52집에 수록하였다.
한국국학진흥원은 2023년 현재 국내 최다인 62만여 점에 이르는 민간기록유산을 보유한 기관이다. 최근 소장자료를 보다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RFID를 도입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아직 빛을 보지 못한 가치 있는 자료의 추가적인 발굴이 기대된다.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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