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 것, 잘 곳, 먹을 것…초보의 '돌로미티 매뉴얼'
이탈리아 북부 돌로미티 5박 6일 종주 트레킹
하늘을 찌를 듯한 첨봉, 소들이 뛰어다니는 푸른 초원. 2009년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된 유럽 하이커들의 성지.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하얀 산봉우리가 카멜레온처럼 색깔을 바꾸는 이곳은 이탈리아 알프스 돌로미티다.
돌로미티산맥에는 프랑스의 뚜르 드 몽블랑TMB과 더불어 유럽을 대표하는 장거리 트레일이 있다. '높은 길High Route'라는 의미의 알타비아Alta Via가 그 주인공인데, 난이도와 코스에 따라 1~10까지 10개 코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알타비아1은 가장 대중적이고, 쉬운 편이다.
알타비아1은 도비아코 근처의 브라이에스호수Lago di Braies에서 출발해 벨루노Belluno에서 끝나는 약 120km의 코스다. 후반부는 난이도가 높아, 많은 이들이 90km 구간인 파소 듀란Passo Duran 혹은 라 피사La Pissa에서 일정을 마친다.
트레일 곳곳에는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산장Rifugio이 많다. 알타비아1 트레커들은 매일 산장을 옮겨 다니는 헛 투 헛Hut to Hut 방식으로 산행을 이어간다. 이러한 방식으로 브라이에스호수에서 파소 듀란까지 약 90km 거리를 5박 6일간 걸었다. 그 경험을 기반으로 알타비아1을 준비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내용과 일정을 소개한다.
Day - 1 브라이에스 호수Lago di Braies – 세네스 산장Rif. Sennes – 파네스산장Rif. Fanes, 21km
도비아코Dobbiaco에서 버스를 타고 브라이에스호수로 향한다. 이곳은 알타비아1 코스의 시작점이자, 유명 관광지. 이른 아침에도 목선을 타고 에메랄드빛 호수 위를 누비는 특별한 경험을 위해 찾아오는 일반 관광객들로 붐빈다. 호수 둘레길이 끝나고부터 본격적인 산행 시작이다. 비엘라산장Rif. Biella까지는 꽤 가파른 오르막이 쭉 이어진다.
장난감 모형같이 생긴 비엘라산장에서 과거 비행기 활주로로 쓰였던 세네스산장까지는 평탄한 길이다. 이곳의 조망은 가을바람처럼 시원하다. '아! 정말 돌로미티에 왔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여유롭게 풍경을 감상하며 걸을 수 있는 구간이다.
세네스산장에서 포다라산장Rif. podara을 지나 페데루산장Rif. pederu까지 이어지는 길은 다소 괴로울 수 있다. 기껏 올렸던 고도를 다시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약 600m의 고도를 가파르게 내려간다. 지그재그로 내려가는 끝없는 임도 위로는 거대한 타메르스Tamersc산맥이 조망된다.
페데루산장은 차도와 연결되어 있다. 때문에 인근 마을과 도시로 나가는 버스가 수시로 드나든다. 15km 지점으로 1일차 일정을 마무리하기 적당한 곳이지만, 숙소를 예약 못한 우리는 파네스산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다시 고도 500m를 올리는 것이 만만치 않다. 그래도 모든 건 끝이 있는 법. 산장으로 가는 길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오고 호텔 같은 파네스산장이 보인다. 우거진 나무 뒤로 우뚝 솟은 봉우리들이 붉은 태양빛을 가득 머금고 있다. 봉우리를 넘어가는 태양과 함께 오늘의 일정도 마무리된다.
브라이에스 호수 이동하기
도비아코 버스 정류장에서 442번 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성수기인 7~8월에는 티켓을 미리 예약해야 한다. 그 이외의 시기는 예약 없이 현장 발권이다. 성수기에는 브라이에스호수에 차량 주차가 제한되기에 자차보다 버스가 유용하다. 도비아코에서 30분 정도 거리다.
2023년 기준 성수기: 7월 10일~9월 10일. 버스비 : 편도 5유로.
Day - 2 파네스산장Rif. Fanes – 포르첼라 델 라고Forcella del Lago – 라가주오이산장Rif. Lagazuoi, 14km
라가주오이산장으로 향한다. 어제의 3분의 2밖에 안 되는 거리. 무난할 거란 예감이 든다. 신발끈을 묶고 짧은 오르막을 오른다. 잠시 후 시야가 확 트인다. 가슴이 뻥 뚫린다.
푸른 초원이 펼쳐진 평탄한 길을 따라 걷는다. 사람들이 쉬고 있는 아담한 산장이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점심 도시락을 미리 챙겨왔다. 구경만 하고 그냥 지나친다.
광활하던 초원길은 점점 좁아지고 커다란 봉우리가 그 자리를 메운다. 사선으로 길게 할퀸 듯한 표면이 인상적인 Piz dles Cunturines다. 잠시 후 갈림길이 나오는데, 두 길 모두 라가주오이산장으로 이어진다. 스코토니산장Rif. Scotoni을 들르려면 로시아고개Col de Locia로 가는 게 편한데, 그럴 생각이 없던 우리는 포르첼라 델 라고로 간다.
약 3km의 오르막을 오른다. 그늘 하나 없는 땡볕 너덜길이다. 중간중간 물도 마시고, 충분히 쉰 뒤에 다시 또 걷는다. 마침내 고개 정상에 도착한다. 끝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눈앞으로 이보다 더 높은 언덕이 보인다. 까마득히 멀어 보이는 탓에 넋 놓고 바라만 본다. 외계 행성에 온 것 같은 이질적인 풍경이다. 그 풍경 꼭대기에 라가주오이산장이 있다.
라가주오이호수Lago di Lagazuoi에 첨벙 빠져들어 더위를 식히고 굉장한 고개를 오른다. 4km의 경사. 마지막 급경사는 체력을 바닥나게 한다. 그때, 아내가 말한다.
"여기 이상한 구멍이 있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만들어진 터널이다. 고산 격전지였던 라가주오이 일대에는 전쟁의 상흔이 많이 남아 있다. 누군가는 이곳을 살아 있는 전쟁 박물관이라 부른다.
점심 어떡하지?
운이 좋다면 산장에서 점심을 먹을 수 있다. 하지만 산장이 없는 구간도 있다. 이때는 산장에서 미리 점심 도시락Lunch Box을 주문하는 것이 하나의 꿀팁이다. 종주 산행은 에너지 소모가 크다. 잘 먹어야 한다. 대부분 산장에서 샌드위치와 과일로 구성된 도시락을 판매한다.
가격 : 8유로 (파네스 산장기준, 산장에 따라 상이)
Day - 3 라가주오이산장Rif. Lagazuoi – 팔자레고고개Passo Falzarego – 아베라우산장Rif. Averau, 7.5km
종주산행을 할 땐 강약조절이 중요하다. 앞선 2일은 다소 힘들었다. 다리를 좀 쉬게 해줄 겸 오늘은 짧은 거리를 걷는다. 라가주오이산장에서 팔자레고고개까지 약 600m의 높이의 급경사를 내려간다. 케이블카가 있지만, 그 아래엔 흥미로운 길이 있다. 이탈리아 군이 전쟁 당시 폭발물로 인한 낙석을 피하기 위해 만든 터널길이다.
8부 능선에 이르자 터널 입구가 보인다. 헤드랜턴을 끼고 발걸음을 들여놓는다. 경사가 가파르다. 설상가상으로 터널은 어둡고 습하며 젖은 곳이 많아 굉장히 미끄럽다. 설치된 와이어로프를 잡고 조심히 내려간다.
터널을 빠져나와 고개로 내려선다. 바이커들과 클라이머들에게 인기 많은 팔자레고고개가 보인다. 돌로미티 교통의 요지이자, 세계적인 사이클 대회인 지로 디 이탈리아Giro d' Italia의 필수 코스인 이곳은 평일임에도 찾는 이들로 붐빈다.
이틀간 산길만 걷다 오랜만에 도로를 만나니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다. 아직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아 도로를 건너 곧장 산으로 올라선다. 아베라우산장으로 가는 오르막은 약 3.5km. 가파르지 않아 대화를 나누며 천천히 오른다.
아베라우산장에서 산행으로 15분 거리에 누보라우산장Rif. Nuvolau가 있다. 상황에 따라 두 곳 중 선택할 수 있는데, 아베라우산장은 특별한 경치가 없는 대신 식사가 훌륭하고, 누보라우산장은 비교적 노후한 시설 대신 굉장한 풍경이 있다.
오늘은 2시도 안 돼서 숙소에 도착한다. 뜨거운 물로 피로를 풀고, 느긋하게 일대를 산책하며 달콤한 휴식을 즐긴다.
돌로미티 산장 즐기기
대부분의 돌로미티 산장에서는 숙식이 가능하다. 성수기인 여름철에는 산장의 인기가 많다. 라가주오이산장의 경우 최소 6개월 전에는 예약해야 한다. 돌로미티산장은 성수기인 6월부터 9월까지만 운영한다.
아베라우산장 도미토리 1박 가격 : 85유로 (한화 약 12만 원, 2023년 조·석식 포함 하프보드 기준)
Day - 4 아베라우산장Rif. Averau – 크로다 다 라고Croda da Lago – 스타울란자산장Rif. Passo Staulanza, 20km
이른 아침 친퀘토리Cinque Torri가 햇살에 붉게 빛나고 있다. 친퀘토리는 돌로미티 지역에서 세체다Seceda, 트레치메Tre Cime와 더불어 인기 있는 관광명소다. 5개의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다.
알타비아1은 입맛에 따라 조금 변형해서 걸을 수 있다. 우리는 지아우고개Passo Giau가 아닌 다른 길로 간다. 우거진 나무와 거대한 암봉 사이에 숨겨진 푸른 호수를 보기 위해서다. 고갯길을 건너자 그늘진 숲길이 나온다. 오랜만에 햇볕이 없어 기분이 상쾌하다. 2시간쯤 오르자 반짝이는 윤슬이 보인다. 페데라호수Lago Federa다. 호수 옆 산장에 앉아 점심식사를 한다. 메뉴는 따뜻한 스프와 시원한 생맥주!
경치 좋은 암브리졸라고개Forcella Ambrizzola를 지나 펠모산Monte Pelmo으로 간다. 돌길, 흙길, 축사장, 비포장도로… 시시각각 풍경이 변한다. 비교적 만만한 비포장도로에서 속도를 높여 보려 했는데 쉽지 않다. 한발한발 디딜 때마다 발바닥이 찌릿거린다. 옆꿈치 보법도 소용없다. 사람들이 모두 지나쳐간다.
피우메산장Rif. Citta di Fiume을 지나 마지막 너덜길로 들어선다. 산장에서 쉬지 않고 강행한 탓인지, 발걸음은 자꾸 느려진다. 생각해 보니 오늘 일정도 만만치 않다. 오르락내리락 20km나 걷는 코스다.
너덜과 진흙길을 지나 고개로 내려선다. 저 멀리 속세의 소리가 들린다. 오토바이와 자동차 소리다. 잠시 후 오늘의 목적지 스타울란자산장이 나온다. 커다란 나무건물이 이렇게나 반가울 수 있을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산장으로 부리나케 몸을 숨긴다.
어떤 신발이 좋을까?
알타비아1은 길고 힘들다. 거리도 거리지만, 자잘한 돌길이 많다. 장거리 산행에서 돌길은 골칫덩어리다. 피로도는 배가 되고, 부상의 위험도 높다. 나는 스카르파Scarpa의 리벨레 런 트레일 러닝화를, 아내는 살로몬Salomon의 중등산화를 신었다. 트레킹을 마치고 아내는 먼지 덮인 신발을 보며 말했다. "발목 있는 단단한 신발 신길 잘했어!" 나는 답했다. "맞아. 발목이 없어도 쿠션이 단단한 신발이면 좋을 것 같아!"
Day - 5 스타울란자산장Rif. Passo Staulanza – 치베타산Monte Civetta – 바졸레르산장Rif. Vazzoler, 15.5km
일정 중 처음으로 차도를 따라 산행을 시작한다. 정면으로는 붉게 물든 치베타Civetta 직벽이 보인다. 왠지 판타지 소설 속 모험가가 된 느낌이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 서늘한 새벽 공기를 마시며 걷는 길. 도로 위에 길게 늘어선 그림자를 보며 몽상도 해본다.
오늘 걷는 코스의 메인은 치베타. 돌로미티 지역에서도 인기 많은 하이킹 코스다. 농장부터 시작되는 가파른 오르막을 1시간가량 오른다. 마침내 경사가 완만해지고, 콜다이산장Rif.Coldai이 보인다. 산장 뒤에 또 하나의 언덕이 보인다. 그것만 넘으면 콜다이호수가 나온다. 산장 옆의 샘터에서 물을 보충하고 천천히 경사를 오른다. 잠시 후 우리는 동시에 "와아!"하고 감탄을 내지른다. 산 중턱에 이렇게 아름다운 호수라니! 당장이라도 달조각 같은 호수에 몸을 던지고 싶은 충동이 인다.
장대한 암벽, 황량한 공간, 그리고 무더운 햇빛. 다행히 치베타 북벽은 커다란 우산이 되어 내리쬐는 태양을 막아준다. 북벽 쪽에서 커다란 낙석소리가 들린다. 낙석이 자주 발생하는 탓인지, 북벽 쪽 트레일은 출입을 못 하게 막아 놨다.
저 멀리 티씨산장Rif. Tissi이 보인다. 여기는 치베타 북벽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명소다. 아쉽게도 우리가 갔던 9월 말에는 영업을 종료한 상태였다.
바졸레르산장까지 무난한 길이 이어진다. 볕 잘 드는 초원 위에 누워 보기도 한다. 하늘엔 구름 하나 없다. '오늘 밤에는 쏟아지는 별을 볼 수 있을까?' 산골짜기 어두운 산장. 밤이 되기를 기다렸지만, 생각만큼 별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보름달이 반짝 빛나고 있다. 거대한 암벽에 물든 달빛, 이것도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
알타비아 길찾기
알타비아를 걷다 보면 삼각형 안에 숫자가 적힌 기호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건 알타비아의 트레일 넘버로 산행길잡이 역할을 한다. 알타비아 일부 구간은 다양한 코스가 겹쳐 헷갈릴 수 있다. 데이터가 안 터지는 구간이 많기에 오프라인 GPX 경로나 지도 어플 MAPS.ME는 꽤 도움 된다.
Day - 6 바졸레르산장Rif. Vazzoler – 카레스티아토산장Rif. Carestiato – 파소 듀란Passo Duran, 12km
여행의 마지막은 항상 아쉽다. 오늘을 끝으로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간다. 돌로미티에서의 꿈 같은 5일이었다. 마지막 12km를 걷고 나면, 이 아득하고 황량한 외계행성 같은 산맥과도 안녕이다.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돌아갈 곳이 있기에 여행이 행복한 것이라며 스스로 위로하며 가방에 짐을 넣는다.
해가 뜬 지 꽤 됐는데 밖은 아직 어둡다. 태양은 봉우리를 미처 넘지 못하고, 되레 그림자만 만들고 있다. 날씨가 쌀쌀하다. 그늘진 직벽은 어쩐지 으슥하다. 까마득한 봉우리가 당장이라도 쓰러져 덮칠 것 같은 기분이다.
직벽 가까이 만들어진 트레일을 따라 걷는다. 순간 '어제처럼 낙석이 떨어지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자 발걸음이 빨라진다. 아내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저 멀리 앞서 걷는다. 나는 "같이 가자!"고 소리치며 아내를 따라 위험한 너덜길을 순식간에 통과한다. 뒤편의 하얀 봉우리 위로는 조금씩 햇빛이 들기 시작한다.
포르첼라 델 캄프Forcella del Camp를 오르자 비로소 햇볕이 든다. 이후로는 위험한 것 없이 나긋한 길이 이어진다. 중간에 카레스티아토산장을 지나 곧장 파소 듀란으로 떨어진다. 저 멀리 도로 위를 분주히 움직이는 차들이 보인다. 이젠 정말 꿈에서 깰 시간이다.
5박6일 이탈리아 알타비아1 종주 산행이 막을 내렸다. 이탈리아 알프스의 경이로움을 몸소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알타비아1은 인생 통틀어 가장 행복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언젠가 다시 저 하얀 바위를 두 손으로 잡고 두 발로 뛰고 싶다.
베네치아로 이동하기
성수기에는 파소 듀란에서 베네치아로 가는 버스가 있다. 하지만 성수기가 지나면 해당 노선은 사라진다. 그때는 이동이 번거롭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일단 아고르도Agordo까지 가야 한다. 13km 거리로 도보로 약 2시간 소요되며, 히치하이킹이나 택시로 이동할 수도 있다. 택시는 근처 산장에서 부를 수 있다. 아고르도까지 택시비 약 60유로.
월간산 1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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