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나먼 나라 한센병 환자들에게 40년 바친 두 여인
9월 29일 오스트리아의 한 간호사가 영면에 들었다. 한국에서도 추모 물결이 일었다. 마르가리타 피사레크는 소록도에서 40년 넘게 한센병 환자를 돌보다 고국으로 돌아갔다. 한국에서 그는 단짝 마리아네 슈퇴거와 항상 함께였다. 소록도에서 그들은 각각 ‘작은 할매’와 ‘큰 할매’로 불렸다.
그렇다고 세상 소식에 귀를 닫고 사는 게 능사는 아니다. 세상이 점점 더 빠르게 변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내놓는 온갖 뉴스들로 내가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를 가늠해가며 살아가야 한다. 뉴스를 피할 게 아니라 면역력을 키워야 할 테지만 그게 쉽지는 않다.
그럴 때마다 흔들리는 마음을 잡아줄 선의에 대해 생각한다. 선의란 착하고 올바른 마음을 말한다. 인간이란 본디 선한 존재라는 믿음만큼 중요한 건 없지 않을까. 성기영의 '소록도의 마리안느와 마가렛’에 나오는 마리아네 슈퇴거와 마르가리타 피사레크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인간의 선의는 분명 이 세상에 있다.
소록도의 오스트리아인
마리안느는 1934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다. 신앙심이 깊고 가족 간 우애가 좋은 농가에서 자랐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한 달 전 마을이 공습을 당했다. 마리안느는 부상을 입었고 가족들은 피란을 떠나야 했다. 1947년 마리안느는 성당 주일미사에 참석해 필리핀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한 신부의 강론을 들었다. 마리안느는 세상으로 나가 복음을 전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라는 신부의 말을 가슴에 새겼다.
마가렛은 1935년 폴란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오스트리아계 폴란드인으로 폴란드에서 큰 병원을 운영하던 의사였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소련군이 폴란드를 점령하자 집과 재산을 잃고 오스트리아로 이주했다. 마리안느의 집처럼 신앙심이 깊고 화목한 가정이었다. 마가렛은 14세에 '그리스도왕시녀회’에 입회했다. 일생을 독신과 청빈을 지키며 그리스도의 시녀로 살겠다는 평신도 여성들의 단체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마가렛 아버지의 병원에서 처음 만났다. 마리안느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여성 직업학교에 진학했고, 마가렛 아버지의 병원에 간호사 일을 도우러 왔다. 마가렛은 임시 직원으로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신앙심이 깊었다. 헌신이나 희생 같은 이타적 가치들을 중시하는 점에서도 비슷했다. 두 사람은 1952년 인스브루크 간호학교에 같이 입학했다. 한 신부가 당시 벌어지고 있던 한국전쟁 이야기를 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이때 한국이란 나라를 처음 알게 됐다.
마가렛은 1959년 한국에 왔다. 그리고 경상북도 왜관과 전라북도 전주 등의 한센인 정착촌에서 환자들을 돌봤다. 1961년에는 서울 혜화동에 있는 봉쇄수도원인 가르멜수녀원으로 들어갔다. 한편 마리안느는 소록도의 한센인 정착촌에서 간호사를 구한다는 소식에 다시 자원했다. 이번에는 받아들여져 1962년 한국에 오게 됐다.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 등의 도움으로 소록도에 세워진 영아원에서 아기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마가렛은 1962년 건강이 나빠져 가르멜수녀원에서 나왔다. 소록도에서 열흘을 머문 다음 오스트리아로 떠났다. 마리안느도 1965년 국립소록도병원 조직 개편으로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두 사람은 오스트리아에서 다시 만났다.
소록도를 통한 두 사람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벨기에의 '다미안재단’은 한센병 구호단체였다. 다미안재단은 1966년 우리나라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와 협정을 체결하고 소록도 재원 환자들의 재활 수술 지원에 나섰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1966년 10월 다미안재단의 지원으로 인도의 한센병 치료 기관에서 6개월간 교육을 받고 국립소록도병원 간호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2005년 소록도를 떠나기까지 한센병 환자들을 돌봤다.
한 번도 와보지 않은 동아시아 가난한 나라에 있는 작은 섬. 그곳에는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이들을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돌보았던 이유는, 이곳이 세상에서 가장 도움이 필요한 장소라는 것 말고는 없었다.
"우리, 제일 가난한 나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열네 살 때부터 있었어요."
KBS 다큐멘터리 '소록도 두 할매’에서 마리안느는 이렇게 말한다. 성인이 된 후 거의 일생을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한 것은 14세 때 품은 그 마음이 얼마나 굳은 결심이었는지를 보여준다. 하느님의 부름이라 해도 선의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마운 사람들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왔던 때의 대한민국은 참 가난했다. 거기다 한센병 환자에 대한 사회적 배제는 전염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선 것이었다. 한센병 환자에 대한 멸칭으로 '문둥이’란 말을 썼고, 이들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공공연히 떠돌았다. 가정과 마을에서 쫓겨난 환자들이 소록도에 들어올 때도 일반인과 다른 항구를 이용해야 했다. 마리안느가 1962년 소록도에 왔을 때 환자들의 숫자는 6000명에 달했다.
마리안느가 처음 맡은 일은 한센병 환자 가족의 아기들을 돌보는 것이었다. 소록도에서 환자의 아기가 태어나면 5세까지는 부모가 키운 다음 미감아(아직 감염되지 않은 아이) 수용소로 보내졌다. 수용소로 보내기 전 부모와 함께 지내는 아기들이 병에 전염되지 않도록 돌보는 게 중요했다.
아기들을 돌보는 것은 참 고된 일이다. 마리안느는 새벽부터 일어나 동료 간호사와 함께 아기들을 먹이고 씻기고 재웠고, 아픈 아기들을 치료해야 했다. 물자는 부족했다. 틈틈이 오스트리아에 의약품을 부탁하는 편지를 썼다. 세계 각지에서 의약품과 물품의 기부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큰 도움을 준 곳이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였다. 이곳은 1958년부터 수십 년간 우리나라의 교육·양로·고아·의료사업에 96억 원을 지원했다. 가톨릭부인회는 회비로 기금을 모았다. 또 1년에 한 번 '재의수요일’에 오스트리아 전국에서 가족 단위의 자선 수프 행사를 열었다. 사람들은 이 수프를 먹고 하루 동안 단식이나 절식을 해 돈을 모았다.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는 1973년 소록도에 정신병동을 건립하는 데도 지원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추진한 사업 중 하나였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은 마음까지 아픈 경우가 많았다. 사회의 냉대는 환자들에게 또 다른 상처였다. 오랜 노력으로 병이 완치되어 퇴원한 환자들이 마음의 상처를 입고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가족도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환자들에게 의약품만이 아니라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정성껏 보냈다. 예를 들면, 오스트리아에 있는 마가렛 어머니는 아들이 운영하는 병원 대기실에서 진료를 기다리는 여성들이 구비해놓은 뜨개실과 바늘로 만든 담요를 보내주기도 했다. 이처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정성이 모여 소록도로 전해졌다.
한 사람의 선의는 다른 사람들의 선의를 부른다. 이렇게 모인 선의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세상이 여전히 살 만한 곳이라면, 그건 이런 선의들이 있기 때문일 거다.
선의의 증거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이 감동한 것은 간호사들이 자신들을 대하는 태도였다. 다미안재단에서 파견된 간호사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맨손으로 환자들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간호사들은 맨손으로 직접 피고름을 짜내고 약을 발랐고, 처참한 상태의 다리를 자신의 앞치마에 올려놓고 정성껏 치료했다.
성기영이 말하길, 한센병 환자들은 타인의 눈빛에서 늘 어두운 그림자를 본다. 환자들이 소록도에 오기까지 경험했던 건 자신들을 바라보는 공포의 눈빛이었다. 사람들은 환자들로부터 병이 옮을까 봐 꺼리고, 환자들이 자신들의 근처에 사는 것도 꺼렸다. 모든 것으로부터 추방된 환자들은 깊은 마음의 상처를 갖고 소록도로 쫓기듯 들어왔다. 간호사들은 육체적 노고만이 아니라 따듯한 마음과 손길로 이런 환자들을 구한 거였다.
"아무튼 일을 못하니까, 20L 무거운 주전자를 들고 6층까지 올라가는 거 힘들었어요."
다큐멘터리 '소록도 두 할매’에서 왜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냐는 질문에 대한 마리안느의 담담한 답변이었다. 오스트리아로 돌아가기 전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70세가 넘은 나이까지 종일 환자들을 돌보았다. 두 사람은 새벽 5시에 일어나 5시 30분이면 병원에 도착했다. 그리고 환자들을 위해 물을 끓이거나 우유를 갖다 주었다. 오전 8시 미사를 끝낸 후 9시부터는 치료실 문을 열고 환자를 돌보기 시작했다. 오후 9시나 10시가 돼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2005년 편지 한 장을 남기고 소록도를 떠났다. 평생을 소록도에서 환자들을 돌보며 살았던 터라 고향이라고 노후 준비가 돼 있는 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오스트리아 정부가 주는 연금으로 생활하면서도 틈틈이 주변의 노인들을 돌보는 봉사를 이어갔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봉사에 대해 감사를 표한 일은 많다. 보건사회부와 대한간호협회 등이 감사패를, 우리 정부가 국민훈장 모란장과 국민포장을, 오스트리아 정부가 훈장을, 호암재단이 사회봉사상을 수여했다. 2016년에는 대한민국 명예국민증을 받았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적지 않은 상을 거절했고, 시상식에 참여하는 것도 꺼렸다.
‘소록도 두 할매’에서 마리안느는 그냥 기쁘게 간호사로서 일한 게 끝났다고, "우리는 그렇게 특별한 거 없었고 43년 일하는 동안 기쁘게 우리는 감사를 다 받았다"고 말한다. 남들에게 보여주려고 봉사의 삶을 산 게 아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고 싶다는 처음의 마음 그대로 평생을 살아온 게 자신들에게 기쁨이었다고 마리안느는 이야기한다.
내가 마리안느와 마가렛을 다시 만나려 한 것은 마가렛에 관한 뉴스 때문이다. 그는 2023년 9월 29일 고국 오스트리아에서 선종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시신을 오스트리아 의과대학에 기증하며 마가렛은 봉사와 기쁨의 삶을 마무리했다. 뭉클했다.
성경에서 "사랑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말한 이는 사도 바울이다. 유익을 구하지 않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이 바로 선의일 거다. 평생 다른 사람들에게 베푼 선의가 자신에게도 기쁨이었다는 마리안느의 말은 나를 숙연하게 하는 동시에 위안을 안겨준다. 때때로 세상의 풍파에 흔들리는 내 마음의 중심을 잡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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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동아DB
사진제공 고흥군 마리안느와마가렛재단 예담
성지연 에세이스트, 국문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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