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피랍 조선도공의 역사, 양국 위정자들 엇갈린 논리로 이용
16세기 도공 심당길의 후예로 현재 15대 후손에 이르게 된 심수관 가문은 한국과 일본의 역대 미술 교류사에서 매우 특이한 존재다. 심수관 가문은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일본에 끌려간 숱한 조선 도자기 장인들 가운데 유일하게 수백년 풍상을 겪으며 도예가의 가업을 지켜냈다. 19세기 중엽 일본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크게 가문을 일으킨 12대 심수관의 대활약 이래로 13~15대 후손들이 지금까지 모두 12대의 이름을 그대로 쓰면서 성업하고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건 한국인들 사이에서 심수관은 본업보다 한국과 일본을 잇는 민간외교관으로 우선 기억된다는 점이다. 여기엔 그럴 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심당길이 끌려간 것은 400여년 전 일이지만, 19세기 중후반 12대 심수관이 새롭게 가문을 일으킨 이래 일제강점초기부터 조선을 왕래하면서 벌인 교류의 역사도 100년 이상 쌓였기 때문이다. 최근 근대기 심수관 가문의 도예 기술 혁신과 조선 교류상황에 대해 연구해 지난달 관련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김윤정 고려대 문화유산융합학부 교수의 논고를 보면, 심수관 집안이 조선을 찾아와 교류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기는 13대 때인 1924년께지만 납치도공 후예로서 도자 가마의 명맥을 이어온데 대한 이력은 이미 1900년에 한국에 알려진 것으로 나타난다.
단적인 사례가 1900년 ‘황성신문’ 4월4일치와 10일치에 실린 두 편의 장문 기사였다. 이 기사들은 임진왜란 때 피랍된 원조 심당길 이래 가문의 역사와 12대 심수관이 고급 장식자기를 개발해 명성을 날리고 세계 각국에 수출하는 등의 상황을 상세하게 전하면서 근대화 과정에서 쇠퇴해버린 조선 도자 분야가 본받아야 할 조선인의 후손이자 사업가·장인으로 후손들을 묘사했다. 한일병합 뒤엔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사와 매일신보사 주도로 파견된 규슈시찰단이 1918년에 가고시마의 13대 심수관요를 방문하면서 조선과의 인적 교류가 시작된다.
관련 기사는 그해 4~5월 3차례 ‘매일신보’에 실렸는데, 1918년 5월1일치 ‘록아도의 됴션사 ᄅᆞᆷᄌᆞ손(가고시마의 조선 사람 자손)’이란 제목의 사진에서 13대 심수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921년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이 가고시마의 가마를 방문해 13대 심수관을 격려했고, 이후 조선 13도 군수들이 내지시찰단을 만들어 심수관요를 경쟁적으로 찾았다. 13대 심수관도 1924년부터 1937년까지 꾸준히 조선을 방문했고, 총독부 촉탁으로 임명되어 전국 각지에서 강연회를 개최했다. 고국을 방문한 대외적 목적으로는 조선의 도자기 제조업을 일으켜 내선융화(內鮮融和)에 노력하려 함이라고 언론에 밝혀놓았다. 김 교수는 조선을 일본에 완벽하게 통합하려는 ‘내선융화(內鮮融和)’ 정책의 하나로 이용하려는 총독부의 목적이 있었던 것임에 분명하다고 분석했다.
해방 뒤 한국과의 교류는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14대 심수관이 서울을 방문하면서 20여년 만에 재개됐다. 그 뒤로 주가고시마대한민국명예총영사 임명, 남원명예시민·청송명예군민 인증 등을 통해 14대와 15대 심수관은 일본 속에서 한민족의 얼을 찾은 신화적 사례로 국내 언론 등에 대대적으로 소개됐다. 일제강점기엔 일본 본토 내지와 식민지 조선을 잇는 가교로서, 해방 이후에는 이국땅의 한민족 후예이자 민족혼의 상징으로 이들의 행적과 작품이 인식되고 알려진 것이다. 피랍도공의 후예로서 치열한 노력을 통해 생존한 역사적 과정 자체가 두 나라 위정자들에 의해 각기 전혀 다른 민족적 논리로 이용됐고, 시바 료타로의 소설 등 허구가 곁들여진 여러 픽션적 서술들에 의해 이런 논리는 더욱 증폭됐다.
심수관가를 제외한 납치도공의 후손들은 대부분 일본인에 동화되거나 도자업을 접었다. 일본에서 1614~15년 백토의 광산을 사가현 이즈미야마에서 발견해 일본 최초의 아리타 백자 자기 생산의 원조를 이룬 공적으로 추앙받는 이삼평(李參平)의 경우도 본관과 고향이 어디인지 여전히 실체가 가려지지 않았다. 이삼평도 기록에서 확인된 정식이름이 아니다. 이때문에 규슈도자문화관 등 현지 전시관은 공식 설명문에 이삼평 대신 문헌에서 확인되는 일본식 귀화명 ‘가나가에산베(金ヶ江三兵衞)로 인명을 표기하고 있기도하다. 그의 후손들은 도자업을 100년 이상 끊고 살다가 최근 다시 아리타현에서 가업을 재개했으나 가마의 명망과 규모는 아직 미미한 수준이다. 17~18세기 심수관 가문에 앞서 사쓰마 자기로 명성을 날리던 박평의의 후손은 19세기 아예 가업을 접고 일본 관계로 나아갔다. 13대손 박무덕(도고 시게노리)은 일제 외무상으로 복무하며 전범으로 옥살이를 하다 죽었다.
일본 현지에서는 이들의 기여를 부정하지 않지만 관점이 판이하게 다르다. 사가현 일본 도자문화관 등에 나온 현지 학계의 공식 설명을 보면, 17~19세기 규슈 등 당대 일본의 도자산지들은 조선·중국보다 돈과 기술, 인력의 흐름이 훨씬 원활했던 덕분에 당대 도자예술사의 주역이 될 수 있었다는 시각을 보여준다. 이런 배경 아래 조선은 물론 중국, 유럽 장인들이 가져온 태토, 가마, 장식기법 등의 기술이 한데 어우러져 17~19세기 일본이 세계 도자예술 교류의 주요 거점이 될 수 있었으며, 이런 과정에서 조선 도공들도 17세기초 백토광산 발견과 일본 최초 자기생산 등을 통해 부분적으로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해석하고 있다. 우리 입장에선 일본이 조선 출신 도공의 업적을 축소하는 것 아니냐고 볼 수도 있지만, 역사적 기록과 중국풍과 일본풍의 축조 흔적이 농후한 가마터, 조선백자와는 전혀다른 채색 장식술을 쓴 각종 도자유물 등의 객관적 자료에 바탕해 내놓는 해석이란 점에서 학문적으로 반박하기는 어렵다.
조선 도공들이 세계 미술사상 보기 드물게 납치 등으로 다른 나라로 끌려가 현지의 도자문화를 부흥시키는 데 기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낙후된 일본의 도자문화를 전적으로 조선 도공의 주도 아래 끌어올렸다는 식의 해석은 민족주의적 관점에 따른 또다른 편향에 불과할 뿐이며 세계학계에서도 보편적으로 인정받기 어렵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는 게 국내 도자사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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