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은 굳었어도 그릴수록 자신감”

2023. 12. 18.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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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대상 ‘마음그림 인문학’ 종강 소감
예술위 ‘인문동행 사업’ 위로·치유 효과
‘우리가치 인문동행’의 마음그림 인문학 수업에서 수강생들이 그린 그림들. 청청프로젝트연구소 제공



인천시 미추홀구 주안한신노인회관 방 한가운데에 접이식 교자상 3개가 나란히 붙어 있다. 상 위에는 종이와 연필이 놓여 있다. 24가지 색상의 오일파스텔이 든 상자도 여러 개 올려져 있다. 지난 11월 28일 이곳에서 ‘마음그림 인문학’의 마지막 수업이 있었다. 노인회관은 수업 시작 10여 분 전부터 수강생으로 빼곡했다. 전체 20명의 수강생 중 김장을 하거나 병원에 입원해 출석하지 못한 몇 명만 빠졌다. 이렇게 10월 17일부터 매주 7번의 수업을 했는데, 가장 적을 때도 13명이 참여했다고 한다.

마음그림 인문학 수업은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예술위)가 ‘일상이 풍요로워지는 보편적 문화복지’ 실현을 위해 기획한 ‘우리가치 인문동행’ 사업의 하나다. 이 사업은 2022년 시작해 올해 2년차를 맞았다. 그림수업, 글쓰기 등 지금까지 모두 1200여 회의 인문 강좌 프로그램을 통해 사회 취약계층의 자존감 회복을 돕고, 사회적 연대감을 높였다. 많은 사람이 우울감과 고립감을 느끼기 쉬운 코로나19 팬데믹 국면에서 인문학 수업은 노인과 장애인, 외국인 이주민, 한부모가정 등 소수자들에게 특별한 위로와 치유의 시간이 됐다.

마음그림 인문학 수업을 진행하는 청청프로젝트연구소는 경기도·인천 지역의 복지관과 노인회관, 문화센터 등을 찾았다. 외로움에 노출된 노인과 자기돌봄이 필요한 사회복지종사자를 대상으로 그림수업, 글쓰기 등 인문학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기존에도 노인을 대상으로 한 여가 프로그램이 없진 않았지만, 자기성찰과 문화적 감수성 등 자기 존중감을 올릴 수 있는 프로그램은 흔치 않다. 예술위 관계자는 “일반 강연 형식의 수업은 위로와 격려까지 연결되긴 어렵다고 생각한다. 친밀한 관계 형성에서 시작해서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고, 사회와 이웃의 문제를 돌아보고, 자기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까지 제공한다는 점이 이 사업의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우리가치 인문동행’의 마음그림 인문학 수업에서 수강생들이 그린 그림들. 청청프로젝트연구소 제공



‘우리가치 인문동행’의 마음그림 인문학 수업에서 수강생들이 그린 그림들. 청청프로젝트연구소 제공



‘우리가치 인문동행’의 마음그림 인문학 수업에서 수강생들이 그린 그림들. 청청프로젝트연구소 제공



‘우리가치 인문동행’의 마음그림 인문학 수업에서 수강생들이 그린 그림들. 청청프로젝트연구소 제공



‘우리가치 인문동행’의 마음그림 인문학 수업에서 수강생들이 그린 그림들. 청청프로젝트연구소 제공



그림으로 위로와 치유 넘어 재미까지

수업이 한창인 노인회관을 지난 11월 28일 찾았다. 위로와 공감에서 더 건강하고 긍정적인 인간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처음엔 서로 데면데면했다고 한다. 우리끼리 재밌게 놀 수 있는데 선생님은 왜 왔으며, 그림은 안 해본 것이라 못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수업을 들을수록 분위기가 바뀌었다. 오래전 사라졌다고 생각한 동심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즐거움은 기본이고, 그림 수업을 통해 위로받고 마음을 치유할 수 있었다. 자존감과 자신감도 커졌다. 정순조 노인회장(73)은 자기가 그린 그림에 스스로 놀랐다고 말했다. “아이의 그림 같기도 하고, 우리 노인들이 이런 능력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초등학교 때나 이렇게 그려봤지, 졸업한 지 60~70년 넘었잖아요. 동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 너무 좋았어요.”

이날 마지막 수업에서 정 회장은 책상 앞에 앉아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자신과 친구들의 모습을 담았다. 오일파스텔이 섬세한 표현을 하기 어려워 색연필로 하면 더 예쁘지 않을까라는 의견도 냈다. 정 회장은 “또박또박 그리는 건 아니지만, 내가 생각한 걸 끄집어내 그리기 때문에 괜찮은 것 같아요. 나도 모르는 잠재력을 꺼내놨잖아요. 집중하니까 나도 그릴 수 있다는 걸 느꼈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라고 말했다.

감정과 생각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어르신들도 처음에는 하얀 도화지를 앞에 두고 막막함이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막상 현장을 보니 다들 구상을 끝내기가 무섭게 큰 막힘 없이 쭉쭉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신순례 할머니(85)는 “처음엔 당황했는데, 한번 그리고 나니 더 잘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더라고. 이번에는 더 잘 그려야지”라고 말했다. 나이 들어 손이 굳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밑그림이 그려진 그림 위에 색을 칠하면서 손이 풀린 덕분인지, 그들에겐 이젠 색칠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과거의 기억도 되살아났다. 신 할머니는 어렸을 때 그림과 수를 잘했다고 한다. 꽃을 그려 수를 놓는 법을 친구들에게 가르칠 정도였다.

할머니들은 그러나 전쟁과 가난으로 제대로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김정자 할머니(84)도 나이가 들어 성당에서 한글을 배웠다. 크레용을 만져본 적도 없어 처음에는 그림을 그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남들이 하니, 따라해서 흉내 내는 정도였는데, 그리면서 조금씩 나아졌다. 김 할머니는 “모르는 걸 배우니 행복하다. 강사분이 너무 친절하게 설명을 잘해줘 감사하다”고 말했다.

인천 주안한신노인회관에서 ‘우리가치 인문동행’ 그림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주영재 기자



어르신들은 함께라서 더 재밌게 느끼는 듯했다. 누군가 찾아온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격스러워했다. 일부 수업 참가자들은 지난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 행사로 인근 유치원 아이들과 함께 큰 태극기와 김구 선생이 그려진 공동작품을 만들었다. 그림수업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으로 아이들에게 색칠하는 법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마지막 그림에 담긴 바람

수업을 진행한 최희선 강사는 ‘그림은 누구나 그릴 수 있다. 누구나 화가가 될 수 있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경력이 없어도 작가로 등단한 국내 신예 화가 ‘콰야’ 등 다양한 사례를 들었다. 결과물을 떠나 어르신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직접 확인하면서 그도 보람을 느꼈다.

어르신들만 지내던 공간에 갑자기 미술 전공자가 찾아와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평가받는 것으로 느끼고, 거부감을 갖기 쉽다. 그래서 초기의 낯섦을 허물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최희선 강사는 작은 일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고 격려하면서 이들로 하여금 자신감을 갖도록 했다. “수업에 대한 거부감이 점점 사라지고, 더 적극적으로 바뀌는 분위기나 제가 무언가를 제안할 때 점점 수용적인 태도로 바뀌는 걸 보면서 어르신들에게 비교적 잘 다가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경험이 없고, 접하지 않아서 못 하겠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여기 어르신들은 그런 틀을 금방 깨더라고요.”

수업에서 사례로 든 작가들은 시대별 대표성과 다양성을 고려했지만, 무엇보다 어르신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쉬워야 한다는 기준에서 선정했다. 사담에서 시작해 사회적인 이슈까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연결시켰다. 어르신들은 미국의 팝 아티스트 웨인 티보가 그린 디저트 그림을 보고, 일상에서 접하는 음식을 그렸다. 컵 아이스크림, 팥빙수, 케이크, 도넛, 토스트 등이 화사한 색깔의 그림으로 탄생했다. 하위문화로 취급받던 거리 그림을 예술로 끌어올린 장 미셸 바스키아의 작품을 보면서 사회 문제를 이야기하고, 작품을 재해석하는 시간도 가졌다. 인상파의 대표 화가인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을 보면서는 우정을 이야기했다. 이어 고흐의 그림처럼 그들의 열정을 노랑과 빨강, 파랑 등 원색을 사용해 표현하기 시작했다.

이날은 7번째 수업이자 전체 강좌의 마지막 시간이었다. 신 할머니는 아침 바다에 해가 떠오르는 그림을 그렸다. “이 세상이 좀더 밝아졌으면 좋겠어요. 전쟁 없이 평화로우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그렸어요.” 전쟁을 겪은 세대라 아이들 세상이 평화롭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사방에서 전쟁을 하니 손주들 세대가 살기 너무 힘들잖아요. 앞으로 (기후변화로) 점점 힘들어진 세상이 온다고 하고, 그러니 마음이 너무 아프죠. 우린 끝났지만 자손들, 손주들은 잘살아야죠. 일할 사람도 부족하다고 하고, 국민연금도 동난다고 하니까 걱정이 큽니다.”

어르신들은 그림수업에 대한 애정을 진하게 표현했다. 내년에 또 찾아오길 희망했다. 이곳에서 다시 수업이 열릴지는 불확실하지만 인문동행 사업 자체는 노인과 장애인 등을 중심으로 더 확대될 예정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2월 5일 ‘정신건강정책 비전선포 대회’에서 예방과 치료, 회복에 이르기까지 국가가 국민의 정신건강을 적극적으로 챙기겠다고 밝혔다. 주요 선진국 중 자살률 1위, 행복지수 꼴찌라는 지표에서도 드러나듯이 공동체 붕괴와 과도한 경쟁문화로 정신건강이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됐다는 진단에서다.

국민 전체의 마음돌봄이 사회적 관심사로 부상한 상황에서 인문 프로그램은 특히 노인과 장애인 등 사회 취약계층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김정자 할머니는 그림 수업이 건강에도 좋다고 강조했다. 치매가 걱정돼 시간만 있으면 동화책을 보던 터였다. “자꾸 와서 이렇게 머리를 써야 해요. 세포가 죽는지 기억력이 자꾸 떨어져요.”

양모란 한국예술치료학회 미술치료사는 “그림은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건강하게 표현하는 기회가 된다. 보다 안전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드러낼 수 있게 하면서 심리적 긴장감을 낮추고, 스트레스 해소와 몰입을 통한 정서적 안정감을 경험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양 치료사는 “연령과 생활 수준, 건강 상태와 교육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 노인의 특성을 고려해 보다 구체화된 프로그램이 요구된다”면서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예술강사와 예술치료사 등 전문인력을 양성하고, 노인 관련 복지시설과 지역사회가 연계될 수 있도록 예산과 프로그램으로 정부와 지자체가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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