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칼럼] 90년대식 제조업 프레임에 갇힌 ‘K칩스법’

황민규 기자 2023. 12. 1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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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향자 의원(광주 서구을)이 지난 7일 첨단산업 특화단지 인프라를 국가가 직접 조성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새로운 ‘K칩스법(반도체특별법)’을 발의하며 관련 논의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업계에서는 국회가 여전히 반도체 산업 발전의 핵심을 짚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정책 논의의 방향이 여전히 제조 분야 설비투자에만 치우쳐 정작 성장 산업 분야인 팹리스(반도체 설계), 설계자산(IP), 디자인하우스, 반도체설계자동화(EDA) 등 소위 ‘선진국형’ 사업 육성은 지원 대상에 고려조차 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현재 K칩스법의 골자는 대기업과 중소기업들의 반도체 설비투자에 대해 세액공제율을 높여 투자를 활성화하는 것이다.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기업들의 성장을 촉진하고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대기업의 투자부담을 줄여주자는 것이 핵심이다. 기업들이 세금 부담을 대폭 줄일 수 있어 첨단산업에 대한 투자가 촉진될 수 있다는 기대가 깔려 있다.

문제는 이 같은 K칩스법의 방향성이 현재 한국 반도체 산업의 저변을 넓혀나가고 있는 성장기업들을 모두 배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과거 1990년대 국내에 대형 반도체 공장을 세워나가던 시절 제조업 중심의 관점으로 반도체 산업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대표적으로 인공지능(AI) 반도체 시대의 첨병 역할을 하며 국내외에서 굵직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AI 팹리스는 대다수 설비투자와 관련한 혜택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팹리스는 직접 칩을 생산하지 않고 설계에만 특화한 기업이기에 제조업 중심으로 짜여진 현재의 K칩스법으로는 애초에 지원이 불가능하다. 팹이나 제조설비를 보유하지 않는 소프트웨어, EDA 기업 모두 마찬가지다. 이들은 반도체 개발을 위해 필요한 서버 구축, EDA 툴, 테스트베드 지원 등이 절실한 상황이지만 K칩스법에 해당 사안이 거의 없다.

최근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의 성공 열쇠로 떠오르고 있는 디자인하우스 기업들도 K칩스법에서 배제돼 있다. 선진국형 반도체 산업으로 꼽히는 반도체 IP 기업들도 애초에 고려 대상에서 제외됐다. 한때 미국, 영국 등 해외 기업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반도체 IP 분야에 최근 한국 기업들이 시스템 반도체, 차세대 메모리, 인터페이스, 신경망처리장치(NPU)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IP를 내놓으며 글로벌 AI 반도체 시장 진출에 나서고 있는 만큼 그 어느 때보다 지원이 필요하다.

K칩스법의 본질적인 문제는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반도체법(칩과 과학법)을 복사해 붙여 넣는 식으로 만든 법안이라는 점이다. 국회와 정부는 한국과 미국의 반도체 산업 토양이 다르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미국의 반도체법은 미국 기업들이 반도체 설계, IP, 소프트웨어, 특허 등 핵심 기술을 탄탄하게 갖추고 있지만, 정작 칩을 제조할 팹이 본토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배경에서 탄생했다. 1990년대 이후 미국 반도체 기업들은 비용 절감을 위해 주요 제조시설 대부분을 미국 바깥으로 아웃소싱해왔다. 즉 미 정부는 기존의 아시아(특히 대만 TSMC)에 의존하는 구조를 탈피하고자 제조시설 확충을 목적으로 반도체법을 제정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반면 한국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메모리 반도체의 경우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모두 이미 충분한 수준의 설비투자를 진행하고 있으며, 올해 내내 공급과잉에 시달려 대대적인 감산을 해야할 정도로 생산능력은 충분하고도 넘친다. 성장 산업인 파운드리의 경우 대만에 비해 절대적인 설비 보유량은 부족하지만, 기본적으로 수주형 산업인 만큼 고객사 없이 설비만 지어놓는 것은 오히려 악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

1990년대 인텔과 같은 종합반도체기업(IDM)이 설계와 제조를 모두 주도하던 시대에는 제조업 중심의 전략이 통했을 지 모르지만 지금은 트렌드가 완전히 달라졌다. 반도체 산업은 이제 전문화의 시대로 넘어왔다. 기업이 칩을 만들기 위해서는 IP를 확보한 뒤 EDA 툴을 통해 시뮬레이션하고, 팹리스를 거친 다음에야 제조 단계로 넘어간다. 이후에는 패키징, 테스트 등 후공정으로 다시 한 번 칩의 가치를 끌어올리는 복잡다단한 구조를 띠게 됐다.

종합적으로 보면 한국의 반도체 제조 기술력과 인프라는 이미 세계적인 수준이지만 설계 기술이나 IP, EDA 등 핵심 소프트웨어는 미국 기업에 의존하고 있다. K칩스법을 통해 거두고자 하는 결실이 한국 반도체 산업의 성장이라면 정책적인 방향성을 완전히 다르게 봐야 한다. 기업들의 설비투자에 대해 세액공제율을 높이는 방안이 반도체 기업의 부담을 경감한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지만 결과적으로 제조업에 치우쳐 있는 반도체 생태계를 확대하는 방안이 될 수는 없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흐름에 맞게 국내 반도체 산업 생태계를 발전시킬 방향을 모색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황민규 전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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