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폭력 인정한다더니…배상 소송에선 트집 잡는 정부
정부 “조사부족” “소멸 시효 완성” 주장
법무부 항소포기도 오락가락…“기만적”
“검찰총장이 눈물을 흘리며 사과한 지 5년이 지났지만,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국가 배상 소송을 겪으며 또다시 무너지고 있습니다.”
지난달 8일 서울중앙지법 356호 법정. 형제복지원 불법 구금 피해자 이향직(52)씨의 말에 방청석에서 흐느낌이 터져나왔다. 이씨는 2018년 문무일 당시 검찰총장이 과거 검찰권 남용을 사과할 때만 해도 순탄하게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이씨의 국가 배상 소송은 5년째 1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다.
1~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조사를 통해 과거 국가폭력과 인권침해 사실이 드러나고 있지만, 국가폭력 피해자들은 여전히 정부로부터 피해보상을 받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법정에 선 정부는 ‘손해배상의 소멸시효가 완성됐다’거나 진실화해위 결정에도 ‘피해사실 조사가 부족하다’는 주장을 반복하며 소송을 이어가고, 피해자들은 감당할 수 없는 소송비용과 알 수 없는 정부 항소 기준으로 계속되는 고통을 받는다. 17일 한겨레가 만난 국가폭력 피해자들은 “2차 피해를 입지 않게 정부가 일관된 기준을 마련해 달라”고 입을 모았다.
국가폭력 피해자들은 정부가 국가기관의 조사 결과조차 부정할 때 무력함을 느낀다고 입을 모았다. 검찰총장 사과 뒤 이씨 사건을 진행 하던 재판부는 조정을 시도했지만 정부는 “진실화해위 조사가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2021년 이씨가 진실화해위 결정문을 법원에 제출하자 정부 변호인은 “진실화해위의 조사가 부족하다”고 맞섰다. 이씨는 “검찰총장이 사과를 하고 진화위가 결론을 내렸는데, 정부(법무부)가 앞선 사과와 조사를 모두 부정했다”고 말했다.
2009년 대법원이 “(국가가 개입해 조직적으로 이뤄진 불법행위에 대해서) 국가가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어긋나 권리남용”이라는 판단을 내놨음에도, 정부는 소멸시효를 주장하며 소송을 이어가기도 한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비슷한 판례를 수차례 내놓았지만 정부는 관성적으로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한다. 최근 5·18 민주화운동 유공자(유가족)와 형제복지원, 납북귀환 어부, 전두환 정권 프락치 강요 사건 피해자들이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정부는 모두 ‘소멸시효’를 주장했다. 정부의 이런 태도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취지에도 어긋난다. 전두환 정권 프락치 강요 사건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재판부는 “시효 완성을 주장하는 건 권리남용으로 용납하기 어렵다”며 판결문에서 정부를 비판하기도 했다.
소송비용 문제도 피해자들에게 부담으로 작용한다. 법원이 승소 비율(인정금액과 청구금액의 비율)에 따라 소송비용 부담률을 기계적으로 정하다 보니 소송비용의 상당부분을 피해자가 부담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피해자가 1억원을 청구해서 1천만원이 인정되면 원고와 피고의 소송비용의 90%를 피해자가 부담하게 되는 것이다. 국가폭력이 없었다면 소송까지 오지 않아도 될 피해자들이 소송비용을 걱정하며 청구금액을 적게 써내는 경우도 있다. 때문에 국가폭력 피해자에 대해선 소송비용을 전향적으로 줄여주는 방안이 검토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실제 2021년 서울중앙지법은 1968년 연평도 근해에서 어로작업을 하다 납북된 뒤 돌아와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구속된 고 남계상씨의 유가족이 정부를 상대로 4억원을 청구한 소송에서 8천만원을 인정해 승소비율이 20%였지만 소송비용은 모두 피고가 부담하게 했다.
최근 한동훈 장관 취임 뒤 법무부는 “피해회복을 돕겠다”며 항소 포기 보도자료를 내고 있지만, 항소 포기의 일관된 기준이 없어 ‘생색내기용’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전두환 정권 프락치 강요 사건 손해배상 소송 1심에서 패소한 정부는 지난 14일 ‘국가폭력 사실 입증이 부족하며,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는 이유로 항소했다가, 오후에 돌연 항소를 포기했다. 이날 법무부 보도자료에서 한 장관은 “앞으로도 국민의 억울한 피해가 있으면 진영 논리와 무관하게 적극적으로 바로잡겠다”고 밝혔다. 갑작스런 항소 취소 뒤 보도자료를 통한 사과에 피해자들은 “40년만의 사과가 기만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일선 법원에서 정부에 일관성 있는 사건 지휘를 요구하는 사례까지 나오고 있다. 삼청교육대 피해자들의 국가배상 소송을 대리하는 박서이 변호사는 “최근 재판부가 ‘피해자 관할에 따라 법원 몇 곳으로 나뉘어 사건이 진행되고 있는데, 국가 쪽 소송수행자에 따라 대응하는 태도가 180도로 달라 피해자들이 매우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이런 사안이라면 정부가 일관된 태도나 방침을 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기도 했다”고 말했다.
과거사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각자 국가배상 소송에 나서면서 2차피해를 입지 않게 정부가 선제적으로 보상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지난 12일 진실화해위의 결정문을 받고 국가배상 소송을 준비중인 동해 승운호 납북귀환 어부 고 정덕봉씨의 딸 정귀자(63)씨는 “재판이 시작되면 정부가 사실관계를 다투고 청구금액도 인정이 잘 안된다고 해 너무 걱정이 되고 억울하다”며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 아버지가 고문 당한 사실을 입증할 자료도 없는데 진실화해위가 조사한 만큼 정부가 소송을 거치지 않아도 선제적으로 보상에 나서주면 좋겠다”고 했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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