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 베드로 성당에 선 김대건像… “내가 아니라 기적이 만들었다”
지난 9월,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우측 외벽에 갓 쓰고 도포 입은 김대건 신부(1821~1846) 성상이 세워졌다. 4.5m 높이의 아치형 벽감(壁龕·벽면을 안으로 파서 만든 공간)을 가린 흰 베일이 벗겨진 순간,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신부의 대리석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25세에 순교한 청년 김대건 신부의 온화하면서도 담대한 얼굴, 두루마기 얇은 천이 바람에 살짝 휘날리는 듯한 섬세함에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던 수많은 인파가 탄성을 내뱉었다. 성 베드로 대성전 외벽에 동양 성인의 성상이 설치된 것은 가톨릭 교회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이 성상을 만든 조각가는 한국 작가 한진섭(67). 바티칸 역사를 새로 쓴 그는 “벽감은 건물이 지어진 이래 550년간 비어있던 자리”라며 “김대건 신부님을 위해 이 자리를 비워놓았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각이 그 자리에 딱 들어맞았다”고 했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15일 개막한 한진섭 개인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바티칸에 서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조각상 제작을 의뢰받고 작업해 설치하기까지 모든 과정이 기적의 연속이었다”며 수차례 눈물을 흘렸다.
김대건 신부상이 설치된 건 2021년 로마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으로 부임한 유흥식 추기경의 역할이 컸다. 유 추기경은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바티칸에 김대건 성상을 세우고 싶다는 오랜 소망을 추진했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허락하면서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애초 바티칸은 이탈리아 조각가에게 제작을 맡기려 했으나 유 추기경이 “한국의 성인은 한국 작가가 제작해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다”며 바티칸을 설득해 납득시켰다.
바티칸이 내건 작가 조건은 까다로웠다. 가톨릭 신자여야 하고, 사실적인 돌 조각을 오래 해왔고, 이탈리아 현지에서 작업이 가능할 것. 그는 “제가 이탈리아에서 10년간 유학했고, 가톨릭 신자가 된 것, 2년 전 한덕운 토마스 복자상과 정하상 바오로 성상을 제작한 경험이 있었던 것 등 지나온 모든 과정들이 김대건 신부상을 만들기 위한 훈련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라며 “이 모든 게 다 신의 계획 같다”고 감격해 했다.
바티칸에서 연락을 받은 그는 총 4점의 모형과 이력서를 보냈고, 지난해 7월 1, 2차 심사를 통과해 최종 작가로 결정됐다. 모형 제작부터 대리석을 찾고, 조각을 완성하기까지 총 작업 기간은 2년. 대리석의 고장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카라라에서 원석을 찾는 데만 5개월이 걸렸다. 작품의 높이가 3.7m, 폭이 1.8m였기 때문에 그보다 거대한 원석을 찾아야 했다. “흔히 사람 속을 모른다고 하잖아요. 돌 속은 사람 마음 속보다 더 알 수 없어요. 겉에서 보이지 않았던 무늬나 크랙(금)이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거든요. 이번 작업을 하면서 끝까지 아무 흠결이 안 나온 것도 한국에서 많은 분들이 응원과 기도를 해준 덕분 아닐까요.”
작가는 “작업 중 사다리가 넘어져 높은 데서 떨어진 적도 있었지만,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 김대건 신부님이 옆에서 보살펴주시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조각상을 설치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적은 이어졌다. “대형 크레인으로 거대한 조각상을 들어올렸는데, 거짓말처럼 한번에 벽감 안으로 쏙 들어갔어요. 너무 밀어 넣으면 빼지도 못하는데 한 번에 수평이 딱 맞은 거죠. 마치 김대건 신부님이 ‘여긴 내 자리야’ 하며 뒷걸음질해서 들어간 느낌이었어요.”
그는 “나는 김대건 신부님 조각상을 만들려고 태어난 건가, 이렇게밖에 해석이 안된다”며 또 한번 눈물을 글썽였다. 전시는 김대건 성상이 만들어진 과정을 사진과 영상, 연표 등으로 보여준다. 바티칸에 설치된 것과 동일한 형태의 60cm 크기 김대건 신부상을 새로 만들었고, 최종안이 확정되기 전 바티칸에 제출했던 4가지 모형, 작가가 그동안 작업해온 성상(聖像) 조각등 30여 점을 내년 1월14일까지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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