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손 글씨의 힘
빈 병을 팔아 마련한 돈을 기부한 85세 할머니의 손 글씨 편지가 최근 화제다. 할머니가 손수 쓴 글씨는 이른바 조형적 균일함은 떨어졌다. 하지만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눌러쓴 글씨는 가지런한 인쇄 글씨와 비교할 수 없는 진정성을 우리에게 전달했다. 만약 할머니가 같은 내용의 문장을 워드프로세서로 타이핑해 전했다면 진심을 온전히 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곳에서 디지털 폰트가 대세인 지금도 손 글씨는 사라지지 않고 다양한 자리에서 마음을 전하고 있다. 지난 10월 일본 오사카 한국문화원 초청을 받아 손 글씨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일본인들이 쓴 한글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 붓펜으로 쓴 작품은 유려했고 볼펜으로 쓴 작품은 아기자기했다. 일본 문자는 한 글자가 그대로 완성된 그림을 연상케 하는 반면, 한글은 자유롭게 움직이는 자소가 블록처럼 조합돼 글자를 이룬다. 구조가 완전히 다른데도 수상작들은 그 차이를 이해한 듯 보였다. 한국 문화를 진심으로 이해하려는 높은 열의 때문 아니었을까.
손 글씨에는 진중함이 담기기도 한다. 각종 기관에서 주는 표창장이 대표적이다. 요즘은 표창장도 디지털 폰트로 많이 작성하지만 상급 기관으로 갈수록 손으로 쓴 붓글씨가 많다. 예컨대 대통령 명의로 수여하는 5급 이상 공무원 임명장이나 훈장증에 들어가는 문구는 5급 사무관인 필경사 공무원이 벼루에 먹을 갈아 붓으로 쓴다. 꼭 표창장이 아니더라도 권위가 필요할 때는 활자보다 손으로 쓴 글씨가 더 무게감 있다. 활자는 대량으로 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활자로 된 지면은 ‘한정판’이 아니다.
손 글씨는 그 사람의 ‘정신적 지문(指紋)’이라고 생각한다. 손가락의 지문은 지나치게 많이 쓸 때 닳아서 사라지고 정신적 지문은 너무 안 쓰면 사라진다. 손 글씨를 쓸 일이 별로 없는 시절이지만, 잠깐이라도 펜을 잡고 글을 적어 보면 어떨까? 필사도 좋고 편지도 좋을 것이다. 또 어떤 손 글씨가 우리 마음을 산뜻하게 만들어 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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