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중동천일야화] 경쟁은 하되, 충돌은 없다? 홍해의 암묵적 합의가 깨졌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중동정치 2023. 12. 18.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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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예멘 알살리프 항구 앞바다에서 후티 반군 병사가 해변을 걸어가고 있다. 후티 반군이 지난달 나포한 화물선 갤럭시 리더호가 보인다. 사진=EPA 연합뉴스

홍해는 아름다운 바다다. 남북으로 길게 뻗어 2200㎞에 이르는 바닷길 곳곳은 산호와 망그로브 및 1000종이 넘는 각종 해양 식생을 자랑한다. 사람 손이 닿지 않은 바다 원시림이다. 생물 다양성의 보고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발견된 모든 어종의 14%가 홍해에 서식한다. 다이버들이 열광하는 이유다.

홍해는 번영의 바다다. 아라비아반도 동쪽 걸프 해역(페르시아만)이 석유로 흥했다면, 반대편 홍해는 교역로의 번영을 구가해 왔다. 인도양과 지중해의 물길을 이어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한다. 세계 해상 물류의 12%, 아시아-유럽 교역 물량의 40%가 홍해를 지난다. 석유 시대 이후를 준비하는 사우디는 홍해에 공을 들이고 있다. 5000억달러 규모의 네옴 신도시 구상은 사우디 미래의 사활을 건 프로젝트다. 왕세자는 이란과 마주해 골치 아픈 동부에서 서부 홍해의 네옴으로 미래 성장의 중심을 옮기고자 한다. 수단항만 개발에 30억달러, 90여 섬 관광지 개발에 150억달러를 투자하는 등 사우디가 주도하는 홍해 프로젝트는 인근 연안 국가들의 부를 확대시킬 것으로 보인다. 이 국가들의 국내총생산은 현 1조8000억달러에서 2050년 6조1000억달러로 3배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사우디의 역내 위상도 올라갈 것이다.

그래픽=송윤혜

홍해는 경쟁의 바다이기도 하다. 국제사회의 홍해 항만 및 군사 기지 교두보 경쟁이 치열하다. 11국이 최소 12곳 이상 해군 주둔 시설을 운영하는 중이다. 사우디는 제다의 킹 파이잘 해군기지를, 이집트는 홍해 유역 최대 규모 해군기지인 베레니케항을 자랑한다. 역외 국가들도 발을 들이밀고 있다. UAE는 이집트의 아인 소크나에 이미 대규모 투자를 해왔고, 에리트리아에도 해·공군 기지를 설치한 바 있다. 튀르키예도 눈에 띈다. 2018년 과거 오토만 제국 영토였던 수단의 수아킨섬을 99년 동안 해군 및 군사 시설로 사용할 계획임을 발표하자 사우디와 이집트가 아연 긴장하기도 했다. 압권은 홍해 입구에 위치한 지부티다.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 일본의 기지는 물론 중국 최초 해외 기지까지 주둔 중이다. 홍해의 관문 바브알만데브 해협의 주도권을 다툴 수 있는 지정학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이 국가들 간 암묵적 합의는 있다. 경쟁은 하지만 충돌은 피한다는 것이다. 홍해가 국제 교역을 지탱하는 혈맥이라는 공동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함께 해적 퇴치 작전을 벌이는 등 협력 공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번영의 바다, 그리고 치열한 경쟁 무대인 홍해가 요즘 심상찮다. 가자 사태 이후다. 예멘의 후티 반군이 홍해를 지나는 이스라엘과 관련된 선박을 공격하겠다고 공언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후티의 드론 공격이 보고되고 있다. 지난 15일 2건 선박 피격 사건이 발생했다. 물론 이전에도 후티 반군의 해상 공격과 선박 나포 사례도 있었지만 간헐적이었고 명분도 약했다. 그러나 이번엔 다르다. 후티 반군은 명분을 잡아챘다. 팔레스타인을 핍박하는 이스라엘과 미국 선박을 응징하겠노라 선포함으로써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반칙이자 불법이다. 그러나 현지 분위기는 좀 다르다. 중동의 저잣거리 정서는 반이스라엘 감정이 우세하다. 이스라엘에 대한 보복을 반기는 이가 다수다. 후티 지도자들은 차제에 레바논의 실질 권력인 헤즈볼라 정도의 인지도까지 확보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있지 않을까? 한편 후티 반군에게 재정과 무기는 물론, 전쟁 교리까지 제공하는 이란은 속으로 웃고 있을 것이다. 10월 초 하마스의 공격이 없었으면 사우디와 이스라엘 수교가 곧 성사될 참이었다. 이는 이스라엘의 페르시아만 진입을 의미했다. 턱밑까지 이스라엘군이 밀고 들어올 수 있다는 부담이 작지 않았을 것이다.

하마스의 도발은 상황을 반전시켰다. 이스라엘과 사우디의 수교 교섭이 중단되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피해가 늘면서 역내 친이란 무장 집단을 통해 이스라엘을 공격할 명분을 얻었다. 이란은 북쪽 레바논의 헤즈볼라, 시리아의 이맘 후세인 여단, 가자지구의 하마스, 그리고 남쪽 예멘의 후티 등을 통해 언제든 이스라엘을 칠 수 있음을 드러내는 중이다. 전선을 홍해로 밀어낸 셈이다. 한 때 이란 호르무즈를 세계가 주목했고, 당시는 이란이 수세였지만 이제는 홍해가 주목받으며 이란이 공세적 위치에 있다.

세계는 긴장하고 있다. 미군 함정도 피격 대상이 되다 보니 언제 어떻게 상황이 증폭될지 모른다. 이스라엘은 공격을 당하면 가만히 있는 나라가 아니다. 후티의 공격을 상찬하는 역내 극단주의자들은 확전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공급망과 물류에 타격이 크다. 홍해를 지나는 상선들은 긴장하고 있다. 전쟁 위험으로 인한 보험료가 급등하다 보니 선박당 수만 달러 추가 보험 비용이 들고 있다. 안전을 위해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으로 우회하는 선박도 적지 않다. 세계적 해운 회사 머스크와 하팍로이드는 자사 선박의 홍해 항행을 중단시켰다. 하마스와 후티 등 비국가 행위자 도발의 연쇄 효과로 전 세계 교역까지 흔들리는 격이다.

후티 반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게 급선무이지만 묘안은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가자 사태로 정신없는 이 상황에 국제사회가 대규모 후티 진압 작전을 전개하기는 어렵다. 일단 미국이 주도하는 홍해 안전 항행 태스크포스 등 위력을 통한 방어적 수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국가 간 공조도 절실하다.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중국 측에 태스크포스 동참을 요청했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가자 사태가 해결되어야 후티의 무차별 공격 명분도 약화된다. 팔레스타인의 피해가 늘어간다면 후티는 물론, 역내 친이란 무장 집단은 더 격렬하게 공세에 나설 것이다. 홍해의 안전 항행은 가자지구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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