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사자 제사 지내라고 쌀 내줘…일방통행식 어명에 실망도
- 첨사 등 군사들에 휴가 보내줘
- 장문포 왜 소굴 30명 남고 텅텅
- 현신하지 않은 당포만호에 곤장
- “권율이 수군 이끌고 부산 쳐라”
- 통제사와 의논 없이 조정 명령
- 복잡한 심경 활 쏘면서 다스려
7월8일[8월13일] 맑음.
식후에 나가서 공무를 봤다. 영등포만호, 박 조방장이 와서 만났다. 우수사의 군관 배영수가 그 대장(우수사)의 명령을 가지고 와서 군량 20섬을 꾸어 가지고 갔다. 동래부사 정광좌가 와서 부임했다고 고하고 활 10순을 쏜 뒤 헤어졌다. 종 목년이 돌아갔다.
7월9일[8월14일] 맑음.
말복이다. 서늘한 가을 기운이 느껴지니 온갖 회포가 일어난다. 미조항첨사가 와서 보고 갔다. 웅천현감, 거제현령이 활을 쏘고 갔다. 밤 10시쯤 달빛이 수루에 가득 차니 공연히 마음이 산란해져 일없이 수루 위를 거닐어 보았다.
7월10일[8월15일] 맑음.
몸이 몹시 불편하다. 늦게 우수사를 만나 이야기 나누었는데, 양식이 떨어진 것에 대해 많은 말을 했지만 별다른 대책이 없다. 참으로 민망스럽다. 조방장 박종남이 와 술 몇 잔을 마셨더니 몹시 취했다. 밤이 깊어 수루에 누웠으니 달빛이 수루에 가득 차 일어나는 온갖 정회를 억누를 수가 없었다.
7월11일[8월16일] 맑음.
아침에 어머니께 편지를 쓰고, 다른 여러 곳에도 편지를 써 보냈다. 박영(朴永)이 제 신역(身役)에 나가기 위해 돌아갔다. 나가서 공무를 보고 활 10순을 쏘았다.
7월12일[8월17일] 맑음.
아침식사를 한 뒤에 경상우수사가 와서 보았다. 그와 함께 보통활 10순, 철전 5순을 쏘았다. 해질 무렵에야 서로 회포를 풀고 물러갔다. 가리포첨사도 와서 함께했다.
7월13일[8월18일] 맑음.
가리포첨사와 우수사가 함께 왔는데 가리포첨사가 술을 내놓았다. 보통활 5순, 철전 2순을 쏘았는데, 나는 몸이 몹시 불편했다.
7월14일[8월19일]
늦게 개었다. 군사 등에게 휴가를 주었다. 녹도만호 송여종으로 하여금 죽은 군졸들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쌀 두 섬을 내주었다. 이상록, 태구련, 공태원 등이 들어왔다.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하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태구련은 칼을 만드는 장인인데, 그와 이무생이 함께 만든 이순신의 장검 2자루는 지금 현충사에 소장되어 있다. 이 칼은 2023년 보물에서 국보로 지정되었다.
7월15일[8월20일] 맑음.
늦게 대청으로 나가니 박·신 두 조방장과 방답첨사, 여도만호, 녹도만호, 보령현감, 결성현감 및 이언준 등이 활을 쏘고 있었다. 경상수사도 와서 함께했다. 오늘이 백중날이라 그들에게 술을 주고 서로 씨름을 시키어 승부를 다투게 하였다. 정항이 왔다.
7월16일[8월21일] 맑음.
아침에 들으니 김대복의 병세가 몹시 위독하다고 했다. 매우 걱정스럽다. 곧 송희립, 유홍근을 시켜 치료케 했으나 무슨 병인지를 알지 못하여 무척 답답하다. 늦게 나가 공무를 봤다. 순천의 정석주와 영광의 도훈도 주문상을 처벌했다. 저녁에 원수(권율)와 병사(고언백)에게 갈 공문들을 초잡아 주었다. 미조항첨사(성윤문)와 사도첨사(김완)가 휴가신청서를 제출하므로 성 첨사에게는 10일, 김 첨사에게는 3일을 주어 보냈다. 녹도만호(송여종)에게는 유임한다는 병조의 공문이 내려왔다.
7월17일[8월22일]
비가 왔다. 거제현령이 긴급 보고하는데 거제에 있던 왜적이 벌써 철수하여 돌아갔다고 했다. 그래서 곧 정항을 보내 진위를 확인해 보도록 했다.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적의 정황을 직접 내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내일 오후 출항하여 나간다”는 전령을 냈다.
7월18일[8월23일] 맑음.
아침에 대청으로 나가 박·신 두 조방장과 같이 아침식사를 했다. 오후에 출항하여 지도(통영시 용남면)에 이르러 정박하고 거기서 밤을 지냈다. 한밤 자정에 거제현령이 와서 말하기를, 장문포의 왜적 소굴이 이미 텅텅 비었고 다만 30여 명만 남아있다고 했다. 또 사냥하러 다니는 왜인을 만나 1명은 활을 쏘아 죽이고, 1명은 사로잡았다고 했다. 밤 2시쯤에 지도를 떠나 견내량으로 돌아왔다.
7월19일[8월24일] 맑음.
우수사, 경상수사, 충청수사 및 두 조방장과 함께 이야기하고서 헤어졌다. 오후 4시쯤에 한산진으로 돌아왔다. 당포만호를 찾아서 잡아와 현신하지 않은 죄로 곤장을 쳤다. 김대복에게 가서 병세를 살펴보았다.
7월20일[8월25일] 흐림.
두 조방장과 아침식사를 같이 했다. 늦게 거제현령 및 전 진해현감 정항이 왔다 오후에 나가 공부를 보고, 보통활 5순, 철전 4순을 쏘았다. 경상좌병사(고언백)의 군관이 편지를 가지고 왔다.
7월21일[8월26일]
바람이 크게 불고 비가 왔다. 우후가 들어온다고 들었다. 식후에 태구련과 언복이 만든 환도를 충청수사와 두 조방장에게 각각 한자루씩 나누어 보냈다. 저물 무렵에 아들 회와 울이 우후와 함께 배를 타고 한산섬 밖에 도착했다고 한다. 늦게 아들들이 들어왔다.
7월22일[8월27일]
흐리고 바람이 크게 불었다. 이충일이 그의 부친의 별세 소식을 듣고 나갔다.
7월23일[8월28일] 맑음.
저녁 나절에 말 달릴 터를 보기 위해 원두구미(통영시 한산면 창좌리 입정포)로 갔다. 두 조방장 및 충청수사도 왔다. 저녁에 작은 배를 타고 돌아왔다.
※지금 제승당에서 입정포까지는 해안길로 약 5km이다.
7월24일[8월29일] 맑음.
나라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충청수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7월25일[8월30일] 맑음.
충청수사(선거이)의 생일이라 음식을 마련해 가지고 왔다. 우수사, 경상수사 및 조방장 신호 등과 함께 취하여 이야기했다. 저녁에 조방장 정응운이 왔다.
7월26일[8월31일] 맑음.
아침에 정영동과 윤엽, 이수원 등이 흥양현감과 함께 들어왔다. 식후에 우수사와 충청수사가 와서 조용히 이야기했다.
7월27일[9월1일] 맑음.
어사의 공문이 들어왔다. 내일 진영에 들어온다고 한다.
7월28일[9월2일] 맑음.
아침식사를 한 뒤에 배로 내려가 어사를 맞기 위해 삼도가 합하여 포구 안에서 진을 쳤다. 오후 2시쯤에 어사 신식이 진중에 도착했다. 바로 대청으로 자리를 옮기어 한참동안 이야기했다. 각 수사 및 세 조방장을 청하여 같이들 이야기했다.
※한산도 시절 통제사의 주된 이야기 상대는 세 수사(전라우수사, 경상수사, 충청수사)와 세 조방장(신호, 정응운, 박종남)이었다. 이번에 어사가 왔을 때도 불러 함께 이야기한 사람은 세 수사와 세 조방장이다.
7월29일[9월3일]
흐리고 바람이 크게 불었다. 어사(신식)가 맨 먼저 전라좌도 소속의 5포(五浦)를 점검했다. 저녁에 이곳에 왔기에 점검한 결과를 놓고 조용히 이야기했다.
을미년(1595년) 8월
활 쏘고 군사들 먹이고, 장수들 만나 의논하는 등 통제사의 일상은 계속된다. 특히 하순에는 체찰사(이원익)의 부름을 받고 진주로 가 체찰사를 만나고 촉석루에 올라 제2차 진주성 전투의 참상을 되새기며 비통함을 이기지 못한다.
8월1일[9월4일]
비바람이 크게 일었다. 어사(신식)와 아침식사를 같이 하고 곧 배로 내려가 순천 등 5관(五官)의 배를 점검했다. 저물어서 나는 어사 있는 곳으로 내려가 5관에 대해 점검한 결과를 놓고 함께 이야기했다.
8월2일[9월5일] 흐림.
어사는 전라우도의 전선을 점검한 뒤에 그대로 우수영 산하 남도포의 막사에 머물렀다. 나는 대청에 나가 충청수사와 함께 이야기했다.
8월3일[9월6일] 맑음.
어사는 저녁 나절에 경상도 진으로 가서 점검을 계속했다. 저녁에 나도 경상도 진으로 찾아가서 점검 결과에 대해 같이 이야기하다가 몸이 불편하여 곧 돌아왔다.
8월4일[9월7일] 비.
어사가 내게로 왔기에 여러 장수들을 모아 종일 이야기하고서 헤어졌다.
8월5일[9월8일]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어사와 작별하려고 충청수사 있는 곳에 같이 갔다. 거기서 다 함께(세 수사와 세 조방장) 어사를 전별(餞別)했다. 전별을 마친뒤 조방장 정응운은 돌아간다고 했다.
8월6일[9월9일]
비가 흠뻑 쏟아졌다. 우수사, 경상수사, 두 조방장이 모여 함께 종일 이야기하고서 헤어졌다.
8월7일[9월10일] 비.
아침에 아들 울과 허주 및 현덕린이 우후(이몽구)와 같은 배를 타고 나갔다. 늦게 두 조방장과 충청수사와 함께 이야기했다. 저녁에 선전표신을 가진 선전관 이광후가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 원수(권율)가 삼도 수군을 거느리고 바로 적의 소굴로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이야기하며 밤을 새웠다.
8월8일[9월11일]
비가 계속 왔다. 선전관이 나갔다. 경상수사, 충청수사 및 두 조방장과 함께 이야기했다. 같이 저녁밥까지 먹고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들 갔다.
8월9일[9월12일]
서풍이 크게 불었다.
8월10일[9월13일] 맑음.
몸이 불편한 것 같다. 홀로 수루 위에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다 일어난다. 저녁나절에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보고 난 뒤에 활 5순을 쏘았다. 정제(鄭霽)와 결성현감(손안국)이 같은 배로 나갔다.
※사흘 전 느닷없이, 통제사인 자신과는 의논도 없이, 원수(권율)에게 삼도수군을 이끌고 적의 소굴(부산)로 들어가라 하다니, 그는 조정에서 내려오는 명령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날은 이런 생각들로 견디기 힘든 하루였다. 이럴 때면 항상 이순신은 혼자서 활을 쏘며 자신을 위로했다.
㈔부산여해재단·국제신문 공동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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