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하느님의 은총

혜원 대한불교조계종 조계사 선감 2023. 12. 18. 02:0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혜원 스님(대한불교조계종 조계사 선감)

초등학교 3학년 즈음 12월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날이었다. 요즘은 TV를 보지 않아 어떤지 잘 모르지만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념해 만화영화 같은 것들을 많이 방영하고는 했다. 그해 겨울엔 연탄보일러가 고장 나서 안방이 몹시 추웠는데 차가운 바닥에 두꺼운 솜이불을 깔고는 그 위에서 오형제가 오순도순 앉아 14인치 흑백 티비로 만화영화를 보고 있었다. 춥고 배고픈 시절이었지만 형제들이 모여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으니 마음이 따뜻해져 포근하니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의 은총이 있다면 바로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이 아닐까.'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 누가 내게 하느님의 은총이 무엇이냐, 부처님의 가피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평범한 일상에서도 작은 일에 감사함을 느끼고 미웠던 누군가를 용서하고 작은 잘못이라도 상처 입힌 일이 있다면 진심으로 사죄하는 것 이런 일들은 우리 마음을 밝고 따스하게 만들어준다. 거창하고 신비로운 일을 꿈꾸지만 사실은 마음속의 작은 변화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전체를 바꾸기도 한다.

요즘 젊은 세대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을 잘 모르는 것 같던데 일체유심조는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들어냈다'는 말이다. 일체의 실체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의 분석과 판단은 마음이 하기에 그러한 일체는 모두 마음이 만든다는 말이다. 세상은 좋은가 나쁜가, 선한가 악한가 등도 자신의 선택에 달린 것이다. 불만족스럽고 불행하다고 여기는 상황에서도 그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우리가 세상에 올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고 그 무엇도 죽어서는 가지고 갈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상기시켜 보면 나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좀 더 따스해지지 않겠는가. 나와 가족을 원망하는 이유는 나와 가족이 대단한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세상에 내가 더 잘나 보이기 위한 작은 욕망일 경우가 많다. 그런 욕망 때문에 정작 소중한 존재들에게 원망의 시선을 보내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다. 살을 에는 추위를 원망할 수도 있지만 추위 속에서만 따스함을 느낄 수 있고 폭염 속 더위를 원망할 수도 있지만 더위 속에서만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어렵고 힘든 여건 속에서도 서로에게 응원을 보내는 가족과 친구의 소중함은 드러나고 실패와 좌절 위에서도 그들이 있기에 다시 일어나 한 걸음 내디딜 수 있는 것이다. 뻔한 말이지만 소중한 것은 그것이 있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물과 공기처럼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조계사 공양간에 접한 골목에 저녁이 되면 이불을 깔고 자는 노숙자가 있다. 그가 어떤 사연으로 노숙자가 됐는지 알 수 없으나 노숙자가 되기 위해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제오늘 많이 추워졌는데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지 모르지만 아직 그 자리에 있다면 따스한 꿀물이라도 좀 전해야겠다. 그에게도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바라며.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있지만 굳이 이 글을 쓰는 것은 이러한 일파가 만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세상의 모든 이에게 자비를 베풀 수는 없다. 하지만 나와 가까운 가족과 이웃에게 따스한 마음을 전한다면 그들도 누군가에게 그 마음을 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작은 별빛이 우리를 안심시키고 길을 안내하듯 본능과 욕망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한 사람의 작은 마음에 모두가 마음에 평안을 얻고 길을 찾을 것이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모든 이가 돌아갈 곳은 마음을 어지럽히는 욕망에서 벗어난 밝고 따스한 마음이다. 당분간 추위가 기승을 부릴 모양이다. 몸 따뜻하게 옷을 입고 마음도 따뜻한 기운으로 이 겨울을 지내면 좋겠다. 꿀물 전하러 밖으로 나가봐야겠다.

혜원 대한불교조계종 조계사 선감

Copyright © 머니투데이 & mt.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