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 어때] 열흘 남은 2023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전하는 송년 인사, 영화 ‘리빙’
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신정선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32번째 레터는 지난 13일 개봉한 영화 ‘리빙’입니다. 2023년이 열흘 정도 남았네요. 연초에 세웠던 아롱다롱 계획들은 다 어찌 됐는지. 올해도 이렇게 가버리나 봅니다. 이런 제 마음에 들어온 영화가 ‘리빙’이었습니다. 주인공이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걸 알게 되면서 일이 벌어지거든요. 아니 그럼, 흔하디 흔한 시한부 얘기냐, 하실 수 있는데, 아니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원작을 리메이크했거든요. 어떤 평론가들은 구로사와 감독의 ‘7인의 사무라이’나 ‘라쇼몽’보다 ‘리빙’의 원작 ‘살다’를 더 높게 치기도 해요. 연말연초에 새롭게 자신을 다잡고 싶으시다면 북적거리는 대작보다 이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으실까 해서 골라봤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작가를 가장 좋아하시나요. 저는 가즈오 이시구로입니다. 일본계 영국 작가죠. 1989년에 ‘남아있는 나날’로 부커상을 받았고, 2017년엔 노벨문학상도 받았습니다. (여기서 깨알상식. 부커상이라고 하면 우리나라 작가 한강을 떠올리실텐데, 2016년 한강이 받은 상은 부커상의 자매상인 ‘부커 인터내셔날상’입니다. 2015년에 시상을 시작했고요. 1969년 시작된 부커상과는 별도로 시상합니다. 맨부커상도 들어본 거 같은데 다른 거냐고요. 네, 맨부커상은 영국 맨그룹이 부커상을 후원할 때 후원사를 박아서 부르던 이름입니다. 2002년부터 2019년까지만. 지금은 맨그룹이 후원을 종료해서 그냥 ‘부커상’입니다. 이태원에 있는 뮤지컬 대극장인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은 신한카드에서 후원해서 그렇게 부르죠. 2011년 개관할 땐 삼성카드에서 후원해서 ‘블루스퀘어 삼성카드홀’이었습니다. 새삼스럽지만 문학이든 공연이든 문화도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자본이 브랜드를 지배하는 거죠. 이상 깨알상식 끝)
부커상은 한때 영연방 작가에게만 줬는데, 그래서 그런지 영국적인 정서가 강했죠. 뭐랄까… 늘 어느 구석엔가 어렴풋이 깔려있어요.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회한 같은 것.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이 대표적이 아닐까 싶네요. 안소니 홉킨스와 엠마 톰슨이 주연한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 영화(1994)로도 유명하죠. 전 ‘남아있는 나날’ 이후로 가즈오 이시구로 소설은 무조건 탐독하고 있는데, 영화 ‘리빙’ 홍보 문구를 보고 눈이 번쩍했습니다. 오호라, 가즈오 이시구로가 각본을 쓴 영화가 나왔다니. ‘어머, 이건 봐야해!’
네, 그래서 곧바로 봤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영화수입사에서는 ‘각본 가즈오 이시구로’라고 알리지만, 정확하게는 각본이 아니고 각색입니다. 왜냐면 ‘리빙’은 리메이크작이거든요. 원작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1952년작 ‘살다(生きる, 이키루)’입니다. 올해 아카데미상 후보에도 각본이 아니고 각색 부문에 올랐고요(수상은 불발). 각본은 구로사와 아키라 외 2명이 맞습니다. 그럼 ‘리빙’에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색깔이 얼마나 들어갔을까요.
레터 독자 여러분을 위해 ‘리빙’과 ‘이키루’를 연달아 봤습니다(‘이키루’는 왓챠에 있어요). 두 작품의 골격은 같습니다. 30년간 시청에서 일한 공무원이 있어요. 그의 책장 서랍에는 (제목만 들어도 가슴 답답한) ‘업무 효율성 증대 계획’ 책자가 떡하니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 어린 아들을 혼자 키웠습니다. 집과 시청만 오가던 삶이었어요. 방에는 모범 공무원에게 주는 표창장이 걸려있습니다. 어느날 말기암 판정을 받습니다. 30년간 해왔던 건 시청 업무 뿐인데 이제 와서 남은 날들을 새롭게 살아보려니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아들놈은 유산과 연금에만 관심이 있고요. 쯧쯧. 통장에 든 예금을 인출해 일탈을 감행하지만 쓸 줄을 알아야죠. 노는 것도 놀아본 사람이 할 줄 아는 것.
남은 삶의 의미를 찾아 방황하던 그가 찾아낸 답이 놀이터였습니다. 무슨 놀이터? 저소득 가정의 주부들이 추진하던 동네 놀이터입니다. 여성분들이 시청에 와서 공무원 때문에 고생하는 장면은 원작 ‘이키루’에만 있는데, 이 부분이 정말 재밌습니다. 여성들은 놀이터 설치를 위해 먼저 시민과에 찾아갑니다. 갔더니 공원과로 가래요. 공원과에선 보건과, 보건과 가니 위생과, 위생과 가니 환경위생과, 갔더니 방역과로, 방역과에선 모기 문제를 해결해야 된다며 충역과, 충역과에선 하수관 처리해야한다며 하수과, 하수과에선 ‘하수관은 도로에 있다’며 도로과, 도로과 가니 도시계획과, 이어 소방과, 이어 아동복지과, 마침내 시의회까지. 그런데 시의회 가서 부시장을 만나니 “그런 건 시민과에서 도와드린다”고 하네요. 결국 원점. 연속해서 이어지는 이 시퀀스 연출이 지금 봐도 놀라워요. 어찌나 웃기던지.
주인공은 이런 답답한 시스템 안의 사람이었죠. 그 시스템을 유지하는데 누구보다 성실했고요. 30년을 그렇게 살다 이번엔 시스템에 도전합니다. 여성들과 함께 놀이터 짓기에 나서요. 공원과장을 붙잡고 결재를 받아내려 사정을 합니다. 이따 오라고 해도 꿈쩍도 안 해요. 부시장도 쓸데없는 짓이라고 거절하지만 “한번만 말씀을 들어달라”며 매달립니다. 그 뒤로 어떻게 됐을까요. 영화를 보시면 압니다. ^^
또 한 가지, 영화 제목이 ‘삶(生)’이 아니고 ‘살다(生きる)’라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해요.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살아간다는 행위에 대한 영화라는 거죠. ‘이 삶은 무엇인가'가 아니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얘기라는 뜻이기도 하고요.
제가 ‘리빙’과 ‘이키루’를 연달아 보면서 새삼스럽게 깨달은 사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는 점입니다. ‘리빙’과 ‘이키루’는 각본은 거의 같고, 차이는 감독입니다. ‘리빙’ 감독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올리버 허머너스인데,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가 각색을 해줘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을 넘을 순 없더군요. 구로사와 감독의 ‘이키루’는 70년 전 영화인데 지금 봐도 ‘이건 지금 여기 우리들 얘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삶의 본질이 담겼다는 거죠. 대표적으로 아래 원작 포스터에 나오는 놀이터 장면입니다. 눈 내리는 한밤의 놀이터에서 주인공이 그네를 타며 노래를 부르는 마지막 부분 장면인데, 저 장면 하나로도 ‘이키루’는 두고두고 명작에 남지 않을까 싶습니다. 포스터만 봐도 가슴을 붙들게 하지 않나요. 그런 점에서 예술적인 고민이 적어보이는 ‘리빙’ 포스터는 많이 아쉽네요.
그래도 지금 영화관에서 보시기에 ‘리빙’도 괜찮습니다. 박스오피스 점령한 대작들보다 마음에 남는 수작을 원하시는 분들께 추천합니다. 우선 원작이 뛰어나고, 주인공 역의 배우 빌 나이(Bill Nighy)가 참 우아해요. 올해 74세. 혹시 뱀파이어 영화 ‘언더월드'(2003) 아시나요. 저는 빌 나이를 ‘언더월드’에서 첨 봤는데, 내내 기억에 남았어요. 아마 특유의 딕션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좀 더 대중적으론 영화 ‘러브 액추얼리’(2003)에서 왕년의 인기 가수로 나오면서 유명세를 탔죠. ‘리빙’에선 삶의 막바지에 다다른 사람의 체념과 슬픔, 안으로 터뜨리는 분노까지도 우아하게 표현하더군요.
‘리빙'과 ‘이키루'의 주인공은 남은 시간을 어떻게든 무언가를 해서 새롭게 살아내죠. 올해 남은 열흘쯤. 무엇이든 해서 추억으로 챙겨보시길. 우리는 항상 이렇게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서야 우리가 갖고 있던 것들의 가치를 깨닫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끝으로 ‘리빙’ 예고편 링크를 아래에 붙일게요. 영화관에서 신작으로 보시려면 ‘리빙’을, OTT로 보시려면 왓챠에서 ‘살다(이키루)’를 찾아보세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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