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광암 칼럼]억대 연봉 ‘주 52시간 제외’…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도입할 때
애플-테슬라 신화 탄생시킨 노동문화
日도 노동개혁 위해 ‘脫시간급’ 개혁
한국판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도입 시급
그래도 한 가닥 희미한 불씨라도 살아있는 것을 굳이 꼽자면 노동개혁 정도다. 지금까지 공전을 거듭해온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의 노사정 대표자들이 17일 윤 정부 출범 후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이는 ‘작은’ 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렵게 온 기회인 만큼 어떻게 해서든 살려 나가야 한다.
그러자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올해 3월 추진하려다 무산된 ‘근로시간 개편안’의 틀에 매달리는 것은 헛수고가 될 가능성이 크다. ‘주 69시간 근무’라는 주홍 글씨가 한 번 새겨진 이상, 그것을 지워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아예 판을 바꿔서 윤 대통령의 공약집에도 관련 내용이 있었고 인수위에서도 검토한 적이 있는 ‘화이트칼라 이그젬션(white-collar exemption·고연봉 관리·전문직 근로시간 규제 적용 제외)’부터 테이블에 올려 보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세계적으로 4차 산업혁명의 물결을 선도하는 미국은 한국과 달리 연장근로에 대한 제한이 전혀 없다. 법정 근로시간인 주 40시간을 넘어서는 연장근로에 대해 기본시급의 1.5배에 해당하는 금액을 지급하는 것이 전부다. 그뿐 아니라 총연봉이 10만7432달러를 넘는 고연봉 임원·관리직·전문직·전산직에 대해서는 연장근로 수당을 지급할 의무도 없다. 이것이 이른바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제도다. ‘몰아서 일하기’가 가능한 이런 제도적 바탕 위에서 애플이 나올 수 있었고, 테슬라가 나올 수 있었다.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은 장시간 근로를 장려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가 아니다. 고연봉 관리·전문직의 경우 근로시간이 아니라 일의 성과가 중요하다는 취지에서다. 일본이 2019년 일명 ‘고도(高度) 프로페셔널 제도’라는 이름의 일본식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제도를 도입한 것도 2차산업 중심의 시간급제를 탈피해 노동생산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기 위해서다.
일본의 경우, 노사 합의를 전제로 고도의 전문지식을 갖추고 연수(年收) 1075만 엔이 넘는 노동자에 대해서는 노동시간과 관련된 규제를 하나도 적용하지 않는다. 금융상품개발자, 컨설턴트, 연구개발자, 공인회계사, 변호사 등이 대상이다. 출퇴근이나 휴가에 대해서는 노동자가 자유롭게 의사결정권을 행사한다. 건강을 해치지 않도록 연간 104일의 휴일도 보장받는다.
한국에서도 윤 정부 이전부터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제도 도입 논의가 있었다. 문재인 정부 시절이던 2019년 10월 당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김병관 의원은 ‘근로소득 상위 3% 이내’ 고소득 근로자에 대해 주 52시간 근로제 적용을 제외하는 법안을 대표 발의하기까지 했다.
한국에서 ‘근로소득 상위 3%’면 2021년 기준으로 연봉 1억2200만 원 수준이다. 첨단 분야 연구개발이나 소프트웨어 개발 분야에서 억대 고액 연봉을 받는 핵심 인재라면 회사에 대해서도 충분한 협상력이 있다. 이들의 근로시간까지 국가가 나서서 미주알고주알 간섭하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올해 한국의 대중 무역수지는 31년 만의 첫 적자가 예상되고 있다. 중국 경제가 한국을 추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구조적인 현상이다. 이대로 가면 잠재성장률이 0%대, 심지어 마이너스로 추락할 것이라는 경고도 안팎에서 나온다. 한국 경제가 이처럼 급속히 가라앉는 배경에는 2019년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국 중 34위로 꼽히는 낮은 노동 유연성이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물론 장시간 근로에 따른 부작용을 개선하려면 주 52시간 근로제의 큰 틀은 필요하다. 하지만 주요 경쟁국들에 비해 지나치게 경직적이라는 문제점을 시급히 개선하지 않으면, 반도체 바이오 배터리 미래자동차 인공지능(AI) 금융 등 핵심 분야의 경쟁에서 낙오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의 미래 먹거리를 책임진 핵심 인재들만이라도 획일적인 52시간 규제의 족쇄에서 풀어줄 필요가 있다.
천광암 논설주간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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