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분노해야 할 선택적 침묵
각종 스캔들에도 묵비권 행사
부조리한 상황에 방관하지 말고
끈질기게 묻는 게 민심의 역할
일본 집권여당인 자민당의 아베파 비자금 조성 의혹이 불거진 직후 정치권에서 유행어처럼 반복된 말들이 있었다.
“수사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 “한 번 더 신중히 확인하겠다.”
의혹에 대한 입장을 묻는 말에 당사자들은 표현을 조금씩 달리하며 사실상 대답을 거부했다.
닷새 전인 17일 하세 지사는 도쿄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들에게 1인당 20만엔(약 183만원) 상당의 고액 앨범을 선물로 전달했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자민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올림픽 유치추진본부장을 맡았다. 이 행사는 지방자치단체 관계자 수십명은 물론 기자들에게도 출입이 허용됐던 만큼 곧바로 파문이 일었다. 하세 지사는 “발언을 철회하겠다”고 했지만 그렇게 간단히 정리될 사안이 아니었다.
아베파 비자금 조성 의혹 당사자들과 하세 지사의 태도는 무책임하다는 점에서 같았다. 비판이 쏟아진 게 당연했다. 마쓰노 전 관방장관의 태도를 두고 자민당 무파벌의 한 의원은 아사히신문에 “정권의 중추가 기능을 상실했다”고 꼬집었다. 정부 대변인이자 내각 2인자인 관방장관이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스캔들에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에 개탄한 것이다.
한 정치평론가는 “답변을 삼가겠다”는 말을 비꼬며 “국회의원이 되는 것을 삼가는 것이 좋았다”고 비난했다. 자신의 발언을 철회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뒤 관련 질문에 묵묵부답인 하세 지사를 두고는 “한번 꺼낸 말을 없었던 일로 한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정치인에게 말은 소명이자 무기다.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설명하고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방편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정치인들이 내뱉는 말을 통해 그들 각자를 판단한다. 정치인들이 말을 잘하고, 말하길 좋아하는 이유다. 그런 사람들이 입을 꾹 닫았다. 일본 국민들은 자민당 의원들의 비자금 조성 의혹에 대한 성의 있는 설명을 듣지 못했다. 하세 지사는 스스로 발언을 철회했으니 더는 왈가왈부하지 말라는 태도다.
더없이 공허한 정치인의 말, 유불리에 따른 선택적 침묵은 정치에 대한 불신을 낳는다. 기시다 후미오 내각 지지율이 17.1%란 지지통신 12월 여론조사 결과에서는 비자금 조성 의혹 자체는 물론 정치인들의 무책임함에 대한 일본인들의 분노가 읽힌다. 내각 지지율이 10%대로 내려앉은 건 2009년 9월 아소 다로 내각(13.4%) 이후 처음이다.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느 나라 정치에서나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뻔뻔함은 정치인의 덕목인가 싶어지기도 한다. 언제, 어디서나 있는 일이라 치부하며 그러려니 하고 말 일은 아니다. 후루타 데쓰야 도쿄대 교수(윤리학)의 날 선 비판을 새겨볼 만하다.
“여기서 진정으로 화내지 않으면 공공의 장에서 언어소통 기반이 깨질 수 있다. 이 부조리한 상황에 실소만 해서는 안 된다. … 언론은 끈질기게 물어야 하고, 시민은 ‘이 정도면 괜찮다’라는 말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지금의 풍조를 허용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
강구열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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