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제는 그림 그리는구나” ‘붓질 40년차’ 화가가 말하는, 잘 그린 그림 [요즘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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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정밀하게 그려낸,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거대한 습지 구상화다.
작가는 2017년 뉴질랜드 남섬 여행 중 케플러 트랙(Kepler Track) 인근에서 우연히 만난 습지에서 '하나의 그림' 아이디어를 확장시켰다.
실제 일정한 크기와 간격으로 잘라진 확대된 습지 그림에서는 수풀 한 줄기가 가진 의미가 완전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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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분명 정밀하게 그려낸,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거대한 습지 구상화다. 부드러운 바람에 몸을 뉘었다 일어서는 솜털 같은 물풀의 출렁임까지 재현돼 있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면 작품의 세계는 완전히 달라진다. 곡선으로 뒤엉킨 거친 붓질은 추상을 향해 가고 있다.
여기서 한발짝 더 나아간다. 하나의 거대한 습지 이미지에서 구획된 60점 각각의 작품이 폭이 12m가 넘는 벽에 빽빽하게 나열됐다. 그런데 열두 번째 위치에 있어야 할 그림 한 점이 없다. 관람객이 그림으로 경험할 수 없는 빈자리. 빈 공간은 되려 습지 밖 무한한 공간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렇게 갤러리 안과 밖의 경계가 무너진다. 의도적으로 사라진 열두 번째 그림은 맞은편 벽에 확대된 화면으로 걸려 있다.
그래서 작품과 작품, 그 사이를 잇는 공간에서 관람객은 되묻게 된다. 과연 내가 보고 있는 이미지는 실재하는가.
“이제야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붓질 40여년만에 무언가로부터 해방된 듯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그가 내뱉은 한 마디. 그는 극사실적인 선인장 그림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 이광호(56·이화여대 조형예술대 교수)다.
작가는 “그동안 ‘사진 같다’는 칭찬이 서운했는데, 이번엔 그런 표현을 듣지 않을 것 같다”라고 조심스레 말했다. 과연 그렇다. 더욱 강렬하게 시선의 욕망을 따른 그의 이번 신작은 자연 속 대상의 시각적인 진실에 가까이 가려 한 인상주의 화파를 떠올리게 한다.
이광호가 9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국제갤러리는 올해 마지막 전시로 이광호 개인전 ‘확대(BLOW-UP)’를 열었다. 작가는 2017년 뉴질랜드 남섬 여행 중 케플러 트랙(Kepler Track) 인근에서 우연히 만난 습지에서 ‘하나의 그림’ 아이디어를 확장시켰다. 최근 만난 작가는 “겨울 습지를 방문해 찍은 수많은 사진들 중 한 장을 선정했고, 한 장의 사진을 확대해 픽셀 단위로 쪼개 각각의 캔버스에 그렸다”고 설명했다.
실제 일정한 크기와 간격으로 잘라진 확대된 습지 그림에서는 수풀 한 줄기가 가진 의미가 완전히 사라졌다. 규칙 없이 제멋대로 휘갈겨진 작가 특유의 거친 붓질에서 더욱 강렬하게 전달된다. 언어와 생각이 배제된 채, 오로지 손끝 감각에만 의지해 그가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의 손은 눈, 그 자체가 됐다.
“굳이 상상하지 않습니다. 눈앞에 대상이 상상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잘 그린 그림이란, 결국 어떻게 칠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재현의 기술을 넘어선 ‘매너(Manner)’의 문제죠.”
매너란 테크닉과 구별되는 것으로 전수받을 수도 없고,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화가만의 고유한 붓질을 의미한다. 이는 가수의 음색이나 소설가의 문체와도 같다. 작가는 “화가가 자신의 회화적 감흥을 잘 전달하려면, 당연히 자신만의 매너를 보여야 한다”라며 “다양한 붓을 수집하고 테스트하는데, 가격과 무관하게 그 붓만이 표현할 수 있는 고유한 특성을 새롭게 확인하게 될 때, 화가로서 큰 기쁨을 느낀다”고 말했다.
“젊었을 때는 그림에 어떤 내용, 어떤 주제를 담을 것인가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더 경험이 쌓이면 ‘어떤 맛’으로 그림을 그릴 것인가, 더 깊이 고민하게 됩니다. 결국 회화의 기본 요소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실재하지만 실재하지 않는 그의 그림 앞에 서면, 오롯이 감각하는 즐거움이 더욱 격렬해진다. 작품의 왼쪽 아래 귀퉁이에는 작가를 상징하는 ‘꿩’이 그려져 있다. 무한하게 뻗는 실재 세계로 관람객을 안내하는 화가로서의 역할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전시는 내년 1월 28일까지.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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