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목소리의 목소리가 되자
내가 신문에 글을 쓴다는 것을 알고 나서 어머니는 그런 당부를 하셨다. 미움받게 쓰지 말고 좋은 말만 쓰라고. 왜 그런 말씀을 하셔요? 어련히 알아서 잘 쓰겠냐마는 세상이 하도 야박하니 안 그러냐. 하지만 엄마, 글 쓰는 사람이 그런 마음을 먹으면 글도 망하고 세상도 망해요. 나는 대답했다. 황반변성으로 시력을 거의 잃은 어머니는 이제 글을 읽지도 못하는데, 마음이라도 편하시도록 네, 엄마, 그렇게 할게요, 그러고 말 걸 후회도 했지만, 어쩌면 저 대답은 나 자신에게 하는 다짐의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4년 가까이 이 지면에서 4주에 한 번 칼럼을 썼고, 오늘 마지막 칼럼을 쓴다. 나에게 이 지면의 의미가 무엇이었고 어떻게 써왔는지, 돌아보는 글로 최종 마감을 하려고 한다.
여러 장르의 글을 쓰고 있지만 나에게는 신문 칼럼이 가장 쓰기 어려운 글이었다. 특히 독자를 특정할 수 없다는 점이 힘들었다. 독백이 아닌 한, 말은 늘 대상을 향한다. 다른 매체에 쓰는 글은 청탁할 때부터 주제를 한정하여 청탁을 하고, 글을 읽어줄 대상도 어느 정도 그려진다. 하지만 신문의 독자 대중은 범위가 너무 넓고, 허공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어색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누가 이 지면을 필요로 하고, 지금 여기에 어떤 글이 쓰이길 원하는가. 세상에는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 하지만 나에겐 너무나 크게 들리는 목소리가 있다. 그 목소리를 듣고 쓰자. 그러고 나니 막막함이 어느 정도 가셨다. 그러면 누구의 목소리로 말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해진다. 훌륭하다 생각하는 다른 필자들을 보면서 배웠다. 그들은 때로는 살해당하는 동물이 되고, 잘려나가는 나무가 되고, 부당하게 해고당한 노동자, 추방당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되었다. 그들의 말은 보이지 않는 존재가 아니라 보지 않으려는 존재가 문제이며, 말할 수 없는 자가 아니라 들을 수 없는 자가 있을 뿐임을 증명했다.
그런데 목소리를 듣고 쓰기는 다른 곤란함을 야기한다. 목소리가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걸 써야 한다, 이것도 꼭 써야 한다, 목소리들이 싸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매번 칼럼 때마다 주제의 경합이 생겼다. 며칠 전부터 준비한 초고가 있는데, 갑자기 어떤 사안이 돌발하기도 한다. 그럴 때는 판단을 해야 한다. 준비된 글을 안전하게 보낼 것인가, 아니면 지금 난입해 들어온 새로운 목소리로 주제를 바꿀 것인가. 대체로 아우성치는 목소리를 외면하지 못했다. 오피니언 지면은 말 그대로 여론의 형성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치려고 쓰는 장이니, 그래야 마땅하기도 했다. 그런 날은 마감 하루 전에 주제가 바뀌기도 하고, 조금 아쉬운 상태로 글이 나가기도 하지만, 그래도 칼럼은 완성도보다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이제는 확신한다.
가장 큰 어려움은 검열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독재국가 정보기관의 검열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자본국가의 시장 검열이다. ‘이렇게 써도 될까’를 생각하며 문장을 고칠 때마다 이런 것이 자기검열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떨칠 수 없었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두둔할 수 있지만,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안전한 글이란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나아가 바람직한 것일까, 스스로 안전한 글쓰기의 전략을 그렇게 변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어야 했다. 자기 이름을 걸고 공개적으로 쓰는 일은 ‘야박한 시대’에는 ‘무서운 시대’와는 다른 의미에서 감수해야 할 위험이 많았다. 어머니는 어떻게 아셨을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참담한 댓글도, 득달같은 항의도, 갑작스럽게 강의가 취소되고, 열광하며 다가왔던 사람들이 차갑게 돌변하는 일도.
오늘날 한국 사회 어느 분야에서든 작동하는 소비자주의는 언론에 대해서도 여지없이 작동한다. 듣고 싶은 말을 해주지 않는 매체는 구독을 철회하고, 듣기 싫은 소리를 하는 필자는 읽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구독’과 ‘좋아요’가 곧 돈으로 환산되는 시대에 구독 철회는 투자 철회와 같은 의미다. 전문가 지식인이라 하는 이들의 글이 점점 오락화·연성화되고, 민감한 쟁점을 회피하거나, 중립이나 양비론, 애매한 화합론으로 마무리하는 경향은 시장의 구조적 강압과 무관하지 않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이 강압에서 해방되는 길은 지배 언어를 거스르는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기업이 아니라 노동자의 언어로, 부자가 아니라 빈자의 언어로, 북반구가 아니라 남반구의 언어로, 인간만이 아니라 비인간 존재의 목소리로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날 때, 우리는 자본의 언어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함께 목소리의 목소리가 되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채효정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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