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독백·고요·죽음···프레임에 갇힌 사진계에 던진 ‘연출’

이영경 기자 2023. 12. 17.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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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립미술관 ‘구본창의 항해’
‘한국 현대사진 개척자’ 독일 유학 작품 등 1100점 망라
복원·철거 반복됐던 광화문 역사 표현한 ‘콘크리트 광화문’ 첫선
구본창 작가가 13일 서울 중구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구본창의 항해’ 전시 기자간담회에서 병상의 아버지를 촬영한 ‘숨’ 앞에서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구본창 ‘자화상’, 1972, 젤라틴 실버 프린트, 11×9cm.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 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서울시 중구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구본창의 항해’는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의 유명한 구절로부터 시작한다.

일흔살의 구본창은 한국 현대사진의 길을 개척한 대표적 작가로 꼽힌다.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업했지만,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을 “살아 보려고” 독일로 향해 사진 작가가 된다. 젊은 시절의 구본창을 다룬 ‘월간멋’은 특집 기사에서 “장래가 보장된 재벌회사의 외국지사에서 근무하다가 집어치우고 자신이 말하듯 ‘돈 되지도 않는 예술인가 뭔가를 하고 있다’”고 썼다. 이어서 덧붙인다. “과연 그 분야에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얼마나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는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전시 ‘구본창의 항해’에 대해 설명하는 방법은 여러가지다. 한국 현대사진을 대표하는 작가인 구본창의 첫 공립 미술관 개인전, 구본창의 초기작부터 유명한 ‘달항아리’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작품 세계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시 등…. 하지만 이런 식의 설명도 가능하다. 내면의 욕망과 꿈을 외면하지 않고 모험과 도전을 거듭해온 이가 거쳐온 발자취와 마침내 도달한 곳의 풍경을 보여주는 전시, 젊은 구본창의 ‘진지한 노력’과 현재의 구본창이 ‘달성한 목표’를 모두 볼 수 있는 전시이기도 하다.

“우유부단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의견을 표출하기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겪었습니다. 주목받지 못하고 버려진 존재들에 관심을 갖고 작업을 해온 것 같아요. 저처럼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 지 모르는 젊은이들에게 제 삶이 하나의 참고가 되면 좋겠습니다. 사진집에 사인을 받으러 오는 청년들에게 ‘꿈을 꾸는 자만이 꿈에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적어주곤 합니다. 꿈에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귀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구본창 ‘초기 유럽-흑백 010’, 1984, 젤라틴 실버 프린트, 19×29cm
구본창 ‘열두 번의 한숨 01’, 1985, 즉석 필름, 27×11.5cm

지난 13일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구본창은 이같이 말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2024년 사진 미술관 개관을 앞두고 구본창의 대규모 회고전을 열고 있다. 독일 유학 후 한국으로 돌아와 1988년 ‘사진·새시좌’ 전을 열며 객관적 기록으로서의 사진이 아닌 ‘연출 사진(making photo)’이라는 예술사진을 제작해 한국 사진계·미술계에 파란을 일으킨 구본창의 작품 세계를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전시다. 이번 전시에 처음 공개하는 ‘콘크리트 광화문’(2010) 등 500여 점의 작품과 600여 점의 자료와 수집품 등 1100여 점을 전시한다. 최은주 서울시립미술관장은 “국내외 전시를 통해 한국 사진의 세계화에 기여해왔고, 시대를 앞서가는 실험적 작품활동으로 사진을 현대미술의 장르로 확장해 온 구본창 작가의 회고전은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개관을 앞두고 방향을 점검할 수 있는 중요한 전시”라고 말했다.

전시는 유년시절부터 수집해 온 사물들과 중학생 시절 제작한 최초의 작품 ‘자화상’(1968), 대학생 시절 클림트의 ‘키스’ 등 명화를 모사한 그림 등을 선보인 ‘호기심의 방’에서 시작한다. 1972년 남해 상주 해안가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는 자신의 뒷모습을 친구에게 부탁해 찍은 ‘자화상’은 전시의 서막과 같다. 구본창은 “언젠가 저 바다 너머 세상을 향할 것이라는 다짐을 담았다”고 말했다.

구본창 ‘일 분간의 독백’, 1980~1985, 시바크롬 인화, 11×17㎝(×4).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구본창 ‘탈의기 01’, 1988, C-프린트, 111×80.5cm.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모험의 여정’에선 독일 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학교로 유학을 떠나 사진가 구본창으로 탄생하는 순간을 엿볼 수 있다. ‘일 분간의 독백’이 바로 그 순간을 담은 작품이다. 완벽한 A컷이 아니라 즉흥적이고 본능적 느낌을 주는 B컷 네 장을 엮은 작품으로, 독일에서 이방인으로 느끼는 소외감과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을 담은 작품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곳곳에서 마주친 44라는 불길한 숫자, 44분에서 45분에 이르는 ‘일 분’의 시간을 상정해 만든 작품이다.

구본창이 평소 존경하던 사진가 안드레 겔프케를 만난 뒤 “유럽식 사고가 아닌, 한국 유학생의 사고로 사진을 만들어보라”는 조언을 듣고 ‘자신만의 이야기’에 골몰한 결과다. 구본창은 “관객들은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데, 왜 사진 한 장으로 눈물을 흘리는 경우는 적을까 고민했다. 한 장의 사진으로는 많은 이야기를 상상할 수 없지만 네 개의 다른 상황을 보여주면 관람객들이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한국 현대사진의 서막을 연 기념비적 전시 ‘사진·새시좌’에 선보였던 실험적인 작품들도 볼 수 있다. 달항아리 시리즈와 같이 정적이고 여백이 많은 작품을 선보이는 현재의 구본창과 달리 창조적 에너지가 넘치는 작품들이 현재에도 신선한 충격을 준다. ‘탈의기’ 시리즈는 자신의 몸에 해변에 뒹굴던 밧줄을 옭아매는 퍼포먼스를 하면서 이를 사진으로 촬영했다. 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을 표현한 작품으로, ‘연출 사진’이라는 명칭을 얻었다.

재봉틀로 인화지를 이어 박아 남성의 인체를 대형으로 인화한 ‘태초에’, 삼풍백화점 붕괴 등 잇단 재난과 전쟁에 영향을 받아 인화지를 불로 태워 표현한 ‘재가 되어버린 이야기’ 등 실험적 작품들이 강렬한 인상을 준다.

구본창 ‘시간의 그림 01’, 1998, 젤라틴 실버 프린트, 73×101.5㎝. 서울시립미술관

무엇이 실험정신과 변화로 들끓던 구본창을 시적이고 고요한 세계로 이끌었을까. 어머니의 죽음이 ‘일 분간의 독백’을 통해 현대사진가 구본창의 탄생을 촉발했다면, 오랜 시간 병상에 누워 있던 아버지의 투병은 ‘숨’을 통해 구본창의 작품 세계의 전환을 가져왔다. 아버지가 숨지기 한 해 전 촬영된 ‘숨’은 아버지의 몸에서 수분과 근육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쇠약한 아버지가 가까스로 내쉬는 숨을 기록한 사진이다. 구본창은 “한 인간의 마지막 모습을 기록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구본창은 삶과 죽음에 대해 성찰하고, 변화와 순환이라는 동양적 자연관에 바탕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1층에서 2층으로 향하는 통로에선 구본창이 조선 달항아리를 촬영한 ‘문라이징 III’ 12점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1989년 우연히 조선백자 달항아리와 그 옆에 앉은 여성의 사진을 본 구본창은 타국에 있는 조선백자를 안타까워한다. 2004년부터 세계 곳곳의 조선백자를 촬영해 제작했다. 구본창이 본 사진 속 여성은 ‘영국 현대 도예의 아버지’라 불리는 버나드 리치의 제자로, 리치가 소장했던 달항아리는 현재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구본창은 2006년 허가를 받고 리치의 달항아리를 촬영했는데, 이 작품을 비롯해 파리·교토·오사카 등 세계 곳곳의 미술관에 소장된 달 항아리 12개를 각기 다른 흑백조로 촬영해 달이 뜨고 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듯한 작품을 만들었다. 백자 뒤로 흐린 수평선을 만들어 공간감을 더했으며, 달항아리가 바닥과 닿는 부분을 흐릿하게 연출해 달항아리의 아름다움을 부드럽게 표현하는 동시에 달항아리와 배경의 경계, 작품과 보는 이의 경계가 흐려지는 느낌을 준다.

‘구본창의 항해’에 전시된 ‘문 라이징 III’을 관람하는 사람들. 연합뉴스
구본창 ‘콘크리트 광화문 03-1‘, 2010,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100×75cm.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2층 전시장에선 ‘백자’ 시리즈를 비롯해 곱돌 공예품, 천마총의 금관 등 한국의 황금 유물, 전통 가면놀이 등 한국의 다양한 문화유산에 관심을 기울인 작품들을 볼 수 있다. ‘광화문 콘크리트’는 이번 전시에 최초 공개하는 시리즈로, 콘크리트 광화문 부재를 촬영한 작품이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군사독재 등 역사의 부침 속에 복원되고 철거된 광화문의 역사를 담았다.

“조선 백자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데도 자신이 만들어진 곳을 떠나 있죠. 광화문도 귀퉁이에 버려지듯 놓여진 채 굴곡진 역사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제 자리를 찾지 못한 것들에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작업을 해온 것 같습니다.”

내성적이어서 자신을 표현하기 어려웠던 소년이 내면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좇은 결과가 ‘구본창의 항해’다. 전시장엔 구본창이 영화감독 배창호와 함께 작업한 영화 포스터와 영화배우 강수연, 이정재, 심은하 등 당대 청춘 스타들의 사진들, 문예지 ‘현대문학’ 표지로 쓴 사진들 등 다양한 자료들이 함께 전시돼 보는 재미를 더한다. 내년 3월10일까지. 무료.

배창호 감독의 <젊은 남자> 포스터. 구본창이 촬영했다. 이영경 기자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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