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페미니?
[한겨레 프리즘]
[젠더 프리즘] 장수경 | 젠더팀장
“너는 페미니스트야?”
몇달 전 대학 때 친하게 지낸 남자 동기를 만나 들은 질문이다. 질문을 받은 뒤 처음 느낀 감정은 당황스러움이었다. 그동안 받아본 적 없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냐 아니냐를 따지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나는 스스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던 터였다.
“나는 페미니스트지.”
“왜 너 자신을 그렇게 규정해? 네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이 뭐야?”
“여성과 남성은 동등하고, 성별에서 오는 각종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거지.”
“그건 인권 차원에서 당연한 거 아니야?”
친구는 페미니즘의 방향에는 동의하면서도 페미니스트에 대해서는 부정적 생각을 가진 듯했다. 친구는 내게 “너의 정체성을 어느 하나로 규정하지 않길 바란다” “역차별당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2030 남성들의 이야기도 귀담아들어달라”는 말을 남겼다.
최근 게임 업계에서 일하는 여성 작가들을 향해 잇따르고 있는 ‘페미니즘 사상 검증’ 사태를 지켜보면서 당시 대화를 떠올린 건, 페미니스트를 옥죄는 사회 분위기가 전방위적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친구의 질문 의도가 ‘사상 검증’일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질문이 나와 동등한 위치에 선 사람의 ‘순수한 궁금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검열하고, 억누르고, 일자리를 겨냥하고 있다면 말은 달라진다.
지난달 말 남초 사이트와 게임 업체 넥슨이 한 행동은 전형적인 ‘사상 검증’이었다. 남초 커뮤니티는 넥슨의 게임 ‘메이플스토리’ 홍보 영상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손가락 모양을 두고 ‘남성 혐오’라고 주장했다. 근거는 빈약했다. 해당 영상을 작업한 하청 업체의 한 여성 직원이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 계정에 올린 페미니즘 옹호 발언이 전부였다. 전형적인 확증 편향이었지만 넥슨은 별다른 사실관계 확인 없이 해당 영상을 비공개하고 업체 쪽에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
이후 해당 작업물을 그린 이는 40대 남성 애니메이터라는 사실이 보도됐다. 주장의 근거가 사라졌으니, 남초 커뮤니티가 사과했을까. 아니다. 애초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언론의 보도가 거짓’이라거나 ‘남페미는 문제가 아니냐’며 방향을 틀었다. 그사이 해당 여성 직원은 개인 신상 정보가 털리고 온갖 욕설을 듣는 등 사이버불링을 당했다.
퓰리처상을 받은 영국의 저널리스트 제임스 볼은 책 ‘개소리는 어떻게 세상을 정복했는가’에서 ‘진실이든 거짓이든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그럴싸한 허구의 담론’을 ‘개소리’(bullshit)라고 말했다. 개소리꾼의 개소리는 거짓말과 달리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최소한의 진실조차 중요하지 않기에 거짓말보다 해롭고, 팩트로 대응해도 힘을 잃지 않는다고 했다.
“업장에서 왜 사회운동을 하냐”(허은아 국민의힘 의원), “악질적인 점은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이라는 데 있다”(이상헌 더불어민주당 의원), “의도를 가지고 넣었다면 조롱”(류호정 정의당 의원)이라는 정치인들의 반응은 ‘개소리’ 기세를 더 강화할 뿐이었다. 정치권의 메시지는 ‘사상 검증을 하지 말라’ ‘페미니스트가 뭐가 문제냐’여야 했다. 기업은 개소리꾼의 개소리를 수용할 것이 아니라 무시해야 했다. 언론은 ‘집게손 논란’이라는 제목으로 개소리를 앞다퉈 보도하지 말아야 했다.
‘페미니스트는 남성 혐오론자이기 때문에 그런 집게손가락 모양을 넣었을 것’이라는 ‘개소리 담론’에 기업, 정치인, 언론 등이 동조한 결과는 ‘일터를 잃는 노동자’다. 2016년 ‘소녀에게 왕자는 필요 없다’는 글이 쓰인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교체된 성우처럼, 과거 에스엔에스에 페미니즘 관련 글을 올렸다는 이유로 2023년에 계약 해지된 게임 ‘림버스 컴퍼니’의 그림작가처럼 말이다.
개소리를 하며 ‘사상 검증’을 정당화하는 이들에게 말해주자. 너희 주장은 개소리라고. 페미니즘이 뭐가 문제냐고. 너희들이 페미니즘을 알긴 아느냐고.
flying71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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