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록의 캡틴락 항해일지] 필기체 연습
[한경록의 캡틴락 항해일지]
한경록 | 밴드 ‘크라잉넛’ 베이시스트
필기체 연습을 시작한 지 한달이 지났다. 두달 전에는 공연이 많아서 ‘금주놀이’를 시작했다. ‘놀이’라고 이름을 붙이면 힘든 일도 게임이라고 여기고 즐겁게 버텨나갈 수 있다. 금주하고 한달이 지나니 자연스럽게 아침 8시면 눈이 떠졌고, 아침시간을 맑은 정신으로 보낼 수 있었다.
이참에 일어학원에 등록했다. 일주일에 4일, 두시간씩 하는 수업이다. 아침 라디오 생방송 한 날을 제외하곤 지각이나 결석을 하지 않았다. 일어 실력이 얼마만큼 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출석을 해냈다는 것 자체로 뿌듯했다. 재미있는 것은, 성실한 척을 하다 보니 성실해졌다는 것이다. 잘생긴 척하면 잘생겨질까? 세수도 좀 더 꼼꼼하게 하고 머리 손질도 좀 더 정성껏 하고 옷도 깔끔하게 입고 다닌다면 전보다 분위기가 묘하게 좋아질 수 있다.
학원에 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필기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예쁜 필통, 지우개, 조그만 연필깎이, 만년필 등 ‘세상에 이렇게 재미나고 실용적인 장난감이 있었나!’ 싶었다. 볼펜이 하얀 종이 위에 미끄러지는 느낌이 좋았다. 이 펜 저 펜들을 굴려보며, 경주용 자동차를 드리프트 하듯이 곡선을 마구 휘갈겨 보았다. 이 곡선들이 어떻게 하면 의미 있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갑자기 영어 필기체가 떠올랐다. 세상이 참 좋아졌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다양한 필기체 연습 영상들이 있었고, 유려한 선들에 아름다움이 있었다.
나는 악필로 태어났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악필로 살아갈 필요는 없다. 영어든 한글이든 일단 글씨 연습인 필기체 연습에 들어갔다. 연습은 꽤 경이로웠다. 친구가 연습 교본 세권을 보내주면서, 한권만 흉내 내서 써보면 어느 정도 태가 잡힌다고 했다. 마치 한글 처음 배우는 대여섯살 아이처럼 천천히 점선을 따라 그려보았다. 그러다가 점선이 없는 흰 여백에 글씨를 그려보았을 땐, 글씨가 록밴드 콘서트장에서 헤드뱅잉을 하며 날리는 머릿결처럼 아무런 규칙을 찾을 수 없이 자유롭게 날아다녔다.
책상 잘 보이는 곳에 교본을 두고 매일 아침 눈뜨자마자 30분씩 필기체를 써 내려갔다. 반복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필기체를 쓰다 보니 명상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끔 뭘 해야 할지 모를 때, 생각하고 싶지 않을 때, 번민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필기체 연습을 추천한다.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 항상 ‘집중력이 부족하고 주의가 산만함’이라고 쓰여 있었던 아이가 필기체 연습을 하고 있다니 세상일 참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 일이다. 많은 일을 인공지능이 대체한다고 하는데, 창작하는 사람으로서 인공지능이 예측할 수 없는 휴먼이 되고 싶다. 사실 그냥 사춘기 소년처럼 반항하고 싶다.
필기체 연습을 하며 몇가지를 깨달았다.
첫째, 한글자만 잘 써서는 결코 좋은 필기체가 완성될 수 없다. 한글자씩 보면 잘 쓴 글자이더라도 기울기가 다르거나 높이가 일정하지 않으면 좋은 필기체라고 보기 어렵다. 다음 글자가 어떤 글자가 오느냐에 따라 매듭으로 연결되는 꼬리의 위치와 모양이 바뀐다. 다음 글자를 염두에 두지 않은 채 글자를 끝내면 다음 글자 시작점이 애매해져 예쁜 글씨가 나오지 않는다. 왠지 필기체가 사람들 관계와도 닮았다고 생각했다. 나만 잘나면 된다든가 내 생각만 옳다고 느낀다면 그 사회는 조화로운 사회라고 보기 어렵다.
둘째,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쓸모없는 글자는 없다. 점 하나, 선 하나의 꺾어짐까지 하나라도 의미가 없는 것은 없다. 살다 보면 가끔 초라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의미있는 존재다.
셋째, 필기체에는 시간과 바람, 그리고 속도감이 느껴진다. 하얀 종이를 항해하는 기분이다. 지나간 파도는 이미 부서져 버린 것이다. 틀린 글자는 덧칠할 생각하지 말고, 빨리 새로 연습하는 것이 낫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다.
영화 ‘영웅’에서 서예와 무예가 서로 닮아 있듯이, 결국엔 모든 것이 닮아 있다. 획의 위아래에는 중력도 존재한다. 그래서 획을 그을 때 강약을 조절하는 힘조절이 필요하다. 우리의 삶에는 쉼표도 존재하고 마침표도 존재한다.
필기체를 배우고 났더니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어느 날 불어인지 라틴어인지 몰랐던 꼬부랑 간판 글씨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소소하지만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언어뿐이겠는가? 무엇이든 배우고 나면, 그만큼 세상은 아름다움과 의미들로 넘쳐난다.
지금까지 고딕체 같았던 나를 유연하게 해주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부드럽게 연결해 주는 필기체처럼 살아보자. 이것이 나의 필기체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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