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고객 돈 수천억 슬쩍… 증권사 수익률의 민낯
국내 대형 증권사들이 고객들에게 미리 약속한 수익률을 맞춰주기 위해 다른 고객들의 돈을 돌려막기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증권사별로 돌려막기 한 금액은 수백억~수천억원에 달했다.
17일 금융감독원은 미래에셋증권·하나증권·NH투자증권 등 국내 9개 증권사를 상대로 채권형 랩·신탁 업무 실태를 집중 점검한 결과, 이 같은 위법 사실을 적발하고 증권사 운용역 30여 명의 혐의 사실을 수사 당국에 제공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랩어카운트와 특정금전신탁은 증권사가 고객과의 1대1 계약을 통해 자산을 운용하는 금융 상품이다. 다수의 고객 자산을 모아서 운용하는 일반적인 펀드와는 달리 개별 고객에 특화된 맞춤형 전용상품이다. 주로 법인 고객이 단기 자금을 운용하기 위해 랩과 신탁을 이용해왔다.
증권사들은 법인 자금을 유치하기 위해 더 높은 수익률을 제시해왔다. 그런데 시중 금리가 급등하는 등 시장 상황이 바뀌면서 문제가 생겼다. 계약 당시 고객에게 제시한 목표 수익률을 맞추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에 증권사들은 서로 짜고 돌려막기하면서 고객 간 손실과 이익을 이전해 수익률을 맞춰준 것으로 드러났다.
예컨대 A증권사는 만기가 임박한 고객의 계좌에서 손실이 발생할 경우 이 계좌에 들어있는 기업어음(CP)을 B증권사에 비싸게 팔아 수익을 맞추고, 아직 만기가 남은 다른 고객의 계좌에서 B증권사의 CP를 비싸게 되사줬다. 만기가 다가온 고객의 수익을 맞추기 위해 만기가 남은 고객에게 손실을 떠넘긴 셈이다. A증권사는 이 같은 수법으로 다른 증권사와 6000번 넘게 거래하면서 고객 사이에서 5000억원 규모의 손익을 떠넘긴 것으로 조사됐다. 자본시장법은 금융투자업자가 투자자의 이익을 해치면서 자기 또는 제삼자가 이익을 얻도록 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증권사들은 목표 수익률 달성이 어려워지자 CP 등을 비싸게 사들이는 방식으로 고객에게 최초에 제시한 수익률을 맞춰주기도 했다. B증권사는 다른 증권사에 있는 자사의 계좌에서 해당 고객의 CP 등을 비싸게 사주는 방식으로 1100억원 규모의 이익을 제공했다. C증권사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특정 고객에게 700억원가량의 이익을 제공했다. 증권사들의 이 같은 행위는 대표이사 등 주요 경영진의 결정하에 이뤄졌다는 것이 금감원의 설명이다. 투자자에게 일정한 이익을 보장하거나, 이를 위해 사후에 이익을 제공하는 행위 역시 자본시장법 위반이다.
이 밖에도 이번 금감원 검사에서 증권사들이 랩·신탁을 운용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로 위법을 저지른 사실이 드러났다. D증권사는 만기가 1년 미만으로 남아있는 채권만으로 계좌를 운용하기로 고객과 계약했지만, 만기가 4년 남은 채권을 편입해 운용했다. 또 E증권사는 신용등급이 AA+ 이상인 채권만 담기로 했지만, AA- 등급의 회사채를 편입해 운용하는 등 계약과는 다른 식으로 고객 자산을 굴렸던 것으로 조사됐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그간 관행이라는 명목으로 증권사들이 사실상 고객 돈으로 사기를 쳐왔던 것”이라면서 “이번 금감원 검사를 계기로 불법적인 관행이 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감원은 “이번에 확인된 위법행위를 신속히 조치해 시장 질서를 확립하겠다”면서 “운용상 위법행위 등이 발생한 랩·신탁 계좌에 대해서는 금융투자업계와 증권업계가 협의해 적법한 손해배상 절차 등을 통해 환매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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