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데스크] '퀸스베리 룰'을 다시 세우려면
비토크라시 절정 치닫는 한국
합법을 가장한 폭력의 그림자
정치제도엔 관용과 인내 필요
1867년 영국 런던에서 '퀸스베리 룰'이 발표됐다. 권투 경기를 할 때 글러브를 반드시 착용하고, 10초 안에 일어나지 못하면 패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등의 표준 규칙이다. 야만적 폭력이 제도를 통해 스포츠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민주주의 제도가 마련된 것은 그보다 80년을 앞선다. 1787년 필라델피아 제헌회의가 미국 헌법의 초안에 삼권분립을 담아낸 시점이다.
미국 대통령제에서 행정부와 입법부에는 각각 세 가지 배타적 권력이 부여된다. 대통령은 행정명령, 사면, 연방대법관 지명 권리를 갖는다. 의회에는 필리버스터, 임명 동의, 탄핵이라는 세 자루의 칼이 쥐어진다. 미국 정치는 행정부와 입법부가 지난 200여 년간 각자의 배타적 권력의 사용을 자제한 덕에 굴러갈 수 있었지만 이제 관용과 인내가 사라져간다. 정치판은 현인(賢人)들의 토론장이 아니라 데마고그(선동가)들의 연극 무대가 됐다. 상대를 무너뜨리기 위해 합법적으로 부여된 권력의 최대 사용을 주저하지 않는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이런 정치를 '비토크라시(Vetocracy·거부 정치)'라는 용어로 정의한 것은 버락 오바마 정권 때다. 도널드 트럼프 시대를 거치며 대통령제와 양당제가 배태한 거부권 정치에 대한 후쿠야마의 선견지명은 더욱 들어맞았다.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민주주의의 후퇴는 투표함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민주주의를 전복시키는 것은 이제 탱크가 아니라 합법적으로 선출된 권력이라는 아이러니다.
태평양을 건너와보자. 21대 국회는 더불어민주당이 압도적 다수를 점유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여대야소 구조를 활용해 설익은 정책을 밀어붙였다. 국민에게 고통을 떠안긴 임대차 3법이 대표적 사례다.
대선에서 국민의힘이 어렵게 승리했으나 절반의 권력을 찾아오는 데 그쳤다. 야당은 인사 동의권과 탄핵권을 이용해 대법원장 후보를 낙마시키고 장관급 인사와 검사들에 대한 탄핵을 강행했다. 다음 차례는 총선용 특검이다. 한국판 비토크라시가 격화된 다른 이유는 리더들의 행태다. 권력 강화를 위해 정당 민주주의 토대를 약화시킨 책임이 크다. 권력은 기본적으로 폭력적 속성을 지닌다. 그러나 행정권력을 쥔 대통령과 의회권력을 쥔 야당 당수의 리더십 기반에 폭력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초선, 윤석열 대통령은 0선이다. 위계에 익숙한 단체장이나 검찰총장 경험이 전부다. 대선에서 맞붙은 악연 이후 대통령과 야당 당수는 1년7개월간 대화하지 않고 있다. 두 사람은 언론의 질문을 받지 않는다는 공통점도 있다. 윤 대통령은 도어스테핑 폐지 이후 의례적인 기자회견조차 하지 않는다. 국민들은 왜 방송통신위원장에 검찰 출신을 앉히려는지, 김건희 여사의 디올 백 사건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이 대표도 매일 기자들의 질문 세례를 받지만 대부분 대꾸하지 않는다.
다행일까 불행일까, 국민들은 4년마다 선택권을 갖게 된다. 만약 여당이 패한다면 윤석열 정권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임기 내내 여소야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조기 레임덕을 막기 위해 야당과 타협할 가능성은 낮고, 반대로 행정권력의 최대 사용으로 나아갈 가능성은 커 보인다.
여당 승리는 행정권력과 입법권력의 일치를 뜻한다. 윤석열 정부의 어젠다를 실행할 추동력을 확보하게 되지만 권력 견제의 수단은 취약해진다. 다른 선택지도 있다. 중도 성향의 제3당을 교섭단체로 만들어 국민이 정당 간 연대를 강제하는 방식이다. 선거마다 차악을 택해야 하는 괴로움이 따르지만 정치 지형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 국민의 몫이다. 누가 권력을 더 남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판단이 내년 총선 결과를 좌우할 것이다. 퀸스베리 룰을 어기는 정치인을 링에서 쫓아낼 주체도 유권자밖에는 없다.
[신헌철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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