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쇼크로 인한 경기부양책이 지속되는 가운데, 1982년을 변곡점으로 하락하던 부동산 가격이 다시 상승세로 돌아서게 됩니다. 82년 9월 조사결과에 따르면 6개 주요도시 아파트 매매가는 7.9% 상승했고, 전세가는 무려 42.7% 급등했습니다. 치솟는 주택가격에 부동산 투기는 다시 극성을 부렸습니다. 1983년 정부는 아파트 공매시 채권입찰제 실시 등을 내용으로 하는 부동산 투기 억제책을 발표하고, 서울·경기·충남·제주 34개 동과 압구정과 개포 2개 아파트지구를 투기억제특정지역으로 고시했습니다. 하지만 서민들의 주택난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고, 정부는 서울시에 택지를 조성하고 대량의 아파트를 건설해 주택가격 상승에 제동을 걸 것을 요구합니다.
판잣집이 늘어선 뚝방 동네
서울 서남권역의 생활권 중심인 목동 신시가지는 구획정리사업이 아닌 택지개발촉진법을 적용하여 구상한 최초의 개발 사업입니다. 1963년 1월 서울 확장 시 김포군에서 서울로 편입된 이 일대는 편입 이후 80년대 초반까지 절대농지로서 그 기능을 해왔습니다. 절대농지란 도시화·산업화 과정에서 농경지가 감소하여 식량자급자족을 위협하게 되자 1975년 ‘농지의 보전 및 이용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도입한 제도로, 이 지역으로 지정되면 농업 외에 다른 용도변경이 불허되었습니다. 대부분 절대농지였던 목동은 개발 이전 80%가 전답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변에 산재된 공장과 무허가 주택에서 배출되는 생활하수로 인해 농토의 상당수가 오염되었고, 농지로서의 기능을 점차 상실해 가고 있었습니다.
목동을 감싸고 흐르는 안양천은 하천의 길이가 짧아 집중호우 시 물이 빠르게 불고 급류로 변한다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서해안의 조수간만의 차가 심할 때면 밀물 시 한강의 물이 역류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목동 일대는 저습지였고, 홍수 시에는 침수하는 상습 수해지였습니다.
중심부에서 더 떨어진 화곡동, 신정동과 신월동을 아우르는 총 40여만 평은 1965년 주택공사에 의해 이른바 ‘40만 단지’라는 이름으로 먼저 개발되어 주택지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목동 일대 개발에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이곳이 절대농지로 지정된 곳이라는 것과 침수 지역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개발에서 소외된 목동에는 안양천을 따라 무허가 건물들과 판자촌이 한 채 한 채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냄새나는 하천과 오염된 토양, 늘어선 허름한 건물들, 영등포로 일을 나가는 도시빈민들이 뒤섞여 완전한 뚝방 동네를 형성했습니다.
이랬던 목동의 운명을 바꾼 사건이 지난 화에서 이야기한 택지지구 개발과 택지개발촉진법의 등장이었습니다. 택촉법 11조에 따르면 비록 절대농지일지라도 일단 택지개발예정지구로 지정되면 농지의 기능을 상실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서 목동의 시가지화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셈입니다. 사실, 목동을 택지지구로 개발해야만 했던 두 가지의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안양천 정비의 목적이었습니다. 보통 지반의 고도가 12m가 넘어야 홍수를 막을 수 있는데, 개발 이전 목동의 지반고는 5~10m 사이, 평균 6.5m였습니다. 물이 불거나 제방이 일부가 무너지면 대형 참사가 일어날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개발 사업을 진행하며 안양천변의 하수와 배수시설을 새로 구축하고 지반 성토와 제방 건설을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국제행사에 대비한 시가지 현대화의 목적이었습니다. 1981년 9월 열린 IOC 총회에서 서울은 1988년 하계올림픽을 유치하는데 성공했고, 1986년 아시안 게임 개최도 앞두고 있었습니다. 전 세계 각계 고위층을 비롯한 수많은 외국인들이 국제행사가 열리는 서울을 찾을 것이 예견되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김포공항을 통해 대한민국으로 입국하기 직전 비행기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이 안양천을 따라 늘어선 허름한 판잣집과 다닥다닥 붙은 무허가건물, 오염된 하천, 정돈되지 않은 농토들이라는 것에 있었습니다. 이 초라한 풍경은 김포공항에서 시내로 이어지는 김포가도에서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국가 이미지 차원에서 이 일대의 정비가 시급한 상황이었습니다.
목동을 서울 서남부 중심핵으로
건축가 김수근을 비롯해 도시계획가 강병기, 김형만, 오스왈드 네글러 등 당시 내로라하는 도시 전문가들이 목동 신시가지의 밑그림 작업이었던 개발계획에 참여했습니다. 목동은 비슷한 시기 개발된 개포, 고덕, 상계 등의 다른 택지지구와 다르게 서울과 인천을 잇는 ‘핵’으로서 개발할 목적이 있었습니다. 서울시는 강남지역과 비교할 수 있는 서울 서부의 중심지로 목동을 키우려고 했습니다. 따라서 다른 지구에 비해 업무와 행정, 상업지구의 면적을 더 크게 설계했습니다. 목동 도시계획의 특징이라면 중앙부 선형의 중심상업업무지구와 이를 중심으로 양쪽에 주거시설과 공공시설을 배치했다는 점입니다. 주거·상업·업무를 해결할 수 있게끔 개발할 목적이었습니다. 시가지 중심의 순환도로는 일방통행으로 설계하였는데, 이를 통해 평행 노선상의 불균형한 교통량을 처리해 최소한 폭의 도로로 최대한의 차량을 효율적으로 통행하게 할 목적이었습니다.
때마침 신정동에 차량기지 건설이 추진되고 있어 신도림역에서 차량기지까지 지하철 2호선 지선이 지나는 3개의 역이 건설되었습니다. 김포공항에서 광화문을 거쳐 강동 송파로 연결되는 지하철 5호선도 신정동과 목동, 오목교를 지나게 설계했습니다. 중심축의 남·북단에는 각종 공공시설을 배치했습니다. 이화여대부속병원을 유치했고, 잠실 종합운동장에 대응하는 종합운동장과 빙상경기장을 조성했습니다.
서울시는 영동지구 개발 당시처럼 각종 혜택을 주어 명문 학교들을 이전하는데 앞장섰습니다. 물색 끝에 종로·중구의 양정중고등학교와 진명여중고등학교를 목동으로 옮겨오는데 성공합니다. 이처럼 명문 학군이 위치하고 교육열이 높은 전문직·중산층 거주지였던 목동은 이후에 강남 못지않은 학군지로 거듭납니다. 목동역과 오목교역을 중심으로 모인 학원들은 서울에서 대치동 다음 가는 학원가로 꼽히고 있습니다.
논밭에 솟아난 2만 6000세대 아파트
김성배 서울시장은 목동 신시가지에 지어지는 아파트를 분양과 임대 2:1의 비율(분양 67%, 임대 33%)로 공급하기로 결정합니다. 아파트 건설은 ‘초스피드’로 진행되었습니다. 1983년 11월 첫 삽을 뜬 사업은 1986년 말 완공되기까지 햇수로 3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목동지구에는 총 14개 단지의 2만 6,630세대가 지어졌습니다.
앞서 말한 비율에 따라 분양주택이 1만 8,510세대, 임대주택이 8,120세대로 나누어졌습니다. 분양가는 국민주택 규모로 평당 105만 원, 그 이상은 평당 134만 원 수준이었습니다. 서민용으로 공급한 임대아파트는 높은 보증금과 임대료로 인해 입주권 판매의 대상이 되었고, 그 결과 목동은 재산이 있는 사람들의 거주지역이 되었습니다. 이 임대아파트 입주권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택지지구 철거민 이야기와 함께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목동 아파트 단지 당 평균 세대수는 1,900여 세대로 모든 단지가 1,000세대 이상의 대규모 단지인 점이 특징입니다. 또한 아파트 내 녹지공간이 많고, 중층과 저층이 혼합되어 동별로 적정한 조망이 가능케 했습니다. 목동 아파트는 중산층의 수요를 반영해 전용면적 60㎡이상의 중대형 평형들이 다른 택지지구에 비해 높은 비율로 구성되었습니다. 목동 아파트 분양 초기 부동산 침체와 대량 공급으로 인해 미분양이 발생했는데, 중대형 평형 수요가 급감하자 후에 건설하는 단지는 중대형 평형을 제외한 중소형으로 공급되었습니다. 아파트 준공 직후 너무 많은 가구가 한꺼번에 입주하다보니 전화 수요 개설을 감당하지 못해 입주민들이 일 년 동안 전화 없이 지내는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1988년 전까지 목동은 양천구 소재가 아닌 강서구였습니다. 인구가 늘고 시가지 규모가 커지자 강서구에서 목동과 신정동, 신월동을 분리해 양천구를 신설, 행정구역을 조정하게 되었습니다.
<참고자료>
ㅇ 권영덕 외 7인, 서울도시계획사 제3권 「1981~1995년의 도시계획」, 서울역사편찬원
ㅇ 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4」, 한울출판사
정부기록물과 박물관 소장 자료, 신문사 데이터베이스에 잠들어 있는 빛바랜 사진들을 열어 봅니다. ‘사-연’은 그중에서도 ‘길’, ‘거리’가 담긴 사진을 중심으로 그곳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연재입니다. 거리의 풍경, 늘어선 건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 등을 같은 장소 현재의 사진과 이어 붙여 비교해볼 생각입니다. 사라진 것들, 새롭게 변한 것들과 오래도록 달라지지 않은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과거의 기록에 지금의 기록을 덧붙여 독자님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 해당 장소에 얽힌 ‘사연’들을 댓글로 자유롭게 작성해 주세요. 아래 기자페이지의 ‘+구독’을 누르시면 연재를 놓치지 않고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