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필리핀 대통령 주치의’ 사칭범, 경찰 태만으로 중국 도주
경찰이 필리핀 대통령 주치의를 사칭하며 불법 의료행위를 한 중의사에 대한 신고를 받고도 한 달 넘게 입건하지 않아 범인을 놓친 사실이 드러났다. 피해자는 해당 중의사가 도주하려 한다고 경찰에 여러 차례 알렸지만 경찰은 체포와 출국금지 등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결국 중의사는 중국으로 도주했다.
17일 경향신문 취재 결과 경기 성남수정경찰서는 지난 7월20일 중국 국적 중의사 A씨의 의료법위반 사건을 국민신문고로부터 이첩받았다. A씨가 의료면허가 없음에도 지난 5월부터 한 달간 성남시 한 임시 건물에서 B씨에게 침과 뜸, 지압치료 등 불법 치료를 했다는 내용이었다. B씨는 A씨에게 2400만원을 내고 치료를 받았다가 A씨가 지어준 약을 먹고 사경을 헤매자 국민신문고에 신고했다.
B씨는 A씨가 ‘화타 침술’을 이어받았다면서 중국 부총리, 필리핀 대통령, 국내 재계 유명인 등을 도맡아 치료했다고 주장했다고 경찰에 제보했다. 계좌 거래 내역, 불법 의료 행위가 있던 장소 사진, 의료행위 이후 생긴 상처 사진 등 물증도 제시했다.
경찰은 8월7일 A씨를 불러 조사한 뒤 범행을 인정하는 취지의 진술을 받았다. 그러나 경찰은 A씨를 곧바로 입건하지 않고 3주 뒤인 8월28일에서야 수사를 개시했다. 경찰 수사준칙은 피혐의자가 수사기관에 출석하면 즉시 입건하도록 돼 있으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입건이란 수사기관이 사건을 정식으로 접수해 수사를 개시하는 것을 말한다. 정식으로 수사가 개시돼야 강제수사를 할 수 있다.
B씨는 경찰 수사관에게 A씨가 한 차례 도주를 시도한 전력이 있는데다 연락을 끊고 잠적했다며 여러 차례 출국금지 조치를 취할 수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녹취록에 따르면 수사관은 “체포영장을 신청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이에 B씨가 “만약 (A씨가) 출국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자 수사관은 “뭐 어찌 할까요. 제가 뭐 잘못한 게 있어요?” “이봐요. 출국금지 요청은 선생님이 하시는 게 아니구요”라고 했다.
그러는 사이 A씨는 지난 9월16일 중국으로 도주했다. 해당 수사관은 10월5일까지 A씨가 출국한 사실을 몰랐다가 B씨가 알린 뒤에야 뒤늦게 수사중지 처분을 내렸다. 수사준칙에 따르면 사법경찰관은 7일 이내에 수사 결과를 피의자와 고소인 등에게 통지해야 하지만, 해당 수사관은 수사중치 처분을 B씨에게 통보하지 않았다.
B씨는 “경찰이 사건을 수사하는 이유는 범죄를 예방하고 범죄자를 처벌하기 위해서인데, (수사관이) 형식만 갖추고 업무를 처리해 범인을 놓쳤다”면서 “A씨 범행으로 인한 후유증과 고통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추가 피해를 입었다”고 했다.
수정경찰서 관계자는 A씨를 즉시 입건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범죄인지보고서 작성이 늦게 되어 입건일이 미뤄진 것이지 수사를 안 한 게 아니다”라며 “피혐의자 조사를 했으니 입건한 셈”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A씨가 자발적으로 조사를 받으러 왔기 때문에 출국금지 조처도 어려왔다”며 “수사 절차에 문제는 없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는 취재가 시작되자 전날에서야 “A씨에 대한 체포영장을 18일자로 신청할 것”이라며 “인터폴 적색수배 절차 진행을 고려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홍근 기자 redroo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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