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신격화된 이미지에 가려진 초라한 남자의 초상
(시사저널=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미국·영국 배우들이 영어 대사를 주고받는 프랑스 시대극 《나폴레옹》은 혁명 한복판에서 시작한다. 프랑스 대혁명을 논할 때 빠짐없이 거론되는 인물, 마리 앙투아네트의 단두대 처형 장면에서다. 댕강 잘린 앙투아네트 머리를 보고 환호하는 시민들 사이로 카메라가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를 잡는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호아킨 피닉스)다. 마리 앙투아네트만큼이나 역사적으로 이름을 떨칠 포병 장교를 영화는 그렇게 소개한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운이 기운 그 시기, 새로운 얼굴이 등장한 셈이다.
절대 왕정이 무너지고 들어선 공포정치의 혼란 속에서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며 대중의 지지를 얻어낸다. 때마침 나폴레옹 앞에 나타난 여인 조세핀(바네사 커비). 사교 파티에서 만난 조세핀에게 한눈에 반한 나폴레옹은 그녀에게 구애를 하고, 두 사람은 부부의 연을 맺는다. 조세핀과의 사랑과 전쟁 속에서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통해 황제 자리에 오른다.
과감한 해석, 새로운 시각
리들리 스콧과 나폴레옹의 인연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데뷔작 《결투자들》(1977)에서 이미 나폴레옹 시대를 카메라에 담았다. 이 영화에 나폴레옹은 등장하지 않지만, 그 존재는 나폴레옹 지지자 페로우(하비 케이틀)와 황제에 반감을 품은 뒤베르(키스 캐러딘)를 16년 결투로 내몬 결정적 요소로 작용한다. 리들리 스콧은 두 주인공 중 누구의 손을 번쩍 들어주고 싶었을까. 반세기가 지나 스콧은 좀 더 직접적으로 나폴레옹에 대한 그만의 해석을 내놓는다. 흥미롭게도 그의 해석은 관객이 예상한 범위에서 삐쭉 돌출돼 있다. 코르시카섬에서 태어나 프랑스 권력 최정점에 오른 자수성가 위인 나폴레옹은 창작자라면 한 번쯤 정복하고 싶은 인물일 것이다. 프랑스의 근대 국가 기틀을 다지고, 중앙은행 설립 및 고등교육 시스템을 마련한 인물.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 당시 폐지된 노예제를 부활시키고 무리하게 전쟁을 일으켜 많은 국민을 사지로 몰아넣은 전쟁광으로도 평가받는다. 영화는 나폴레옹의 이런 세부적인 치적이나 과오 묘사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의 시선이 머무른 곳은 '인간' 나폴레옹. 그중에서도 신격화된 이미지 속에 가려진 초라한 남자의 초상이다.
그래서일까. 《나폴레옹》을 보면서 떠오른 영화는 장엄했던 리들리 스콧의 또 다른 시대극인 《글래디에이터》(2000)가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구찌 가문의 흥망성쇠를 그린 그의 전작 《하우스 오브 구찌》(2022)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희대의 악녀 파트리치아(레이디 가가)를 경유해 구찌가(家)의 욕망을 조소하듯 그려냈듯, 《나폴레옹》은 조세핀이라는 팜므파탈을 통해 나폴레옹의 결핍과 나약함을 들춰낸다. 아내의 불륜 소식을 견딜 수 없어 중요한 전쟁도 내팽개치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나폴레옹의 모습이 일견 지질하게 그려지기도 하는데, 수많은 서적을 통해 각색됐을 카리스마적 주인공을 범인(凡人)의 위치로 끌어내리는 재해석으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과감한 해석이고, 역사의 아이러니를 돌아보게 하는 일견 흥미로운 시각이다. 나폴레옹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대로할 해석인 것은 분명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영화 개봉 후 프랑스에선 불만과 혹평이 이어졌다. 사실 마크롱 대통령이 나폴레옹 사망 200주년(2021년)을 맞아 그의 묘역에 헌화한 것이 논란이 될 정도로 프랑스에서도 나폴레옹에 대한 여론은 호의적이지만은 않다. 그러나 다른 감독도 아니고, 역사적 라이벌인 영국 출신 감독이 자국의 초대 황제가 일군 성과는 평평하게 누르고 지질한 면모는 입체적으로 부각했으니 심경이 복잡했을 것이다. 나폴레옹 전투의 사상자 수를 친절하게(?) 알려주는 엔딩 자막에 이르면 '리들리 스콧옹이 쐐기를 강하게 박네'란 생각마저 드는데, 영화를 향한 영국 반응은 프랑스와 정반대다.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란, 이토록 상대적이다.
듬성듬성한 편집
《나폴레옹》을 관람한 관객들이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허기짐을 느낀다면, 그건 단순히 나폴레옹을 할리우드식 '영웅' 혹은 '카리스마 넘치는 폭군'으로 그려내지 않아서는 아닐 것이다. 뭔가 더 나올 것 같은 중요한 순간들을 빠르게 스케치하고 넘어가는 듯한 듬성듬성한 편집에 그 이유가 있다. 애플TV+에서 스트리밍될 270분짜리 감독 버전을 극장판 158분으로 축약했으니 대략 사정은 짐작할 수 있으나, 극장판 역시 그 자체로 완결성을 지닌 결과물로 평가해야 하기에 아쉬움이 있는 게 사실이다. 나폴레옹 스스로 희화화된 제스처를 취하는 부분도 적지 않은데, (박정희 저격 사건을 그린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사람들》처럼 블랙코미디로만 즐길 영화도 아니다 보니 장르 면에서 엇박자를 내는 순간도 있다.
나폴레옹보다 극장판에서 더 많이 가지치기를 당한 건 조세핀을 연기한 바네사 커비가 아닌가 싶다. 이 영화에서 조세핀은 매력적이다. 존재감도 크다. 캐릭터나 각본 공이 아니다. 바네사 커비 개인의 힘이다. 공포정치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옥중 임신까지 선택했던 이 생명력 강한 여자 조세핀에게 영화는 심리 변화를 다각적으로 보여줄 시간을 충분히 제공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그녀가 불륜 후에 보이는 도도한 태도, 황제의 아이를 낳지 못해 이혼을 종용당한 연인으로서의 처지, 이혼 후에도 황제의 곁을 떠돈 행적에 연신 물음표를 남긴다.
내용에 대한 호불호와 무관하게 전투 액션 연출에선 이견이 없을 것이다. 감독의 이름값을 확실하게 한다. 밀실에선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일부러 흘리는 호아킨 피닉스도 전쟁터에서만큼은 기세를 꺾지 않는다. 때론 눈빛 하나로 적을 섬멸할 기세다. 툴롱, 아우스터리츠, 마렝고, 보로디노, 워털루 전투로 이어지는 신 모두에 공들인 티가 팍팍 나는데, 특히나 꽁꽁 언 호숫가로 적을 유인한 후 대포를 퍼붓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위용이 백미다. 이때 프랑스에 맞서는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은 나폴레옹이라는 덫에 걸려든 생쥐 같다. 적을 빙판으로 몰아넣은 나폴레옹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포를 쏜다. 대포가 얼어있는 호숫가에 꽂힌다. 적들은 아연실색, 허둥지둥, 혼비백산, 공포에 떨다가 수장된다. 피를 먹어 수묵화처럼 번지는 얼음물을 포착하는 카메라 뒤로 노장 감독의 존재감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나폴레옹에 도전한 감독들
리들리 스콧 이전에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삶을 영화로 옮긴 이들이 있다. 프랑스 감독 아벨 강스는 1927년, 리들리 스콧이 극장판으로 성사시키지 못한 270분짜리 무성영화 《나폴레옹》을 극장에 내걸었다. 세르게이 본다르추크는 1971년작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의 카리스마와 그 이면의 인간적인 면모를 그렸다. 컴퓨터그래픽(CG)이 없던 시절이었음에도 수준급 전투 장면으로 놀라움을 자아냈는데, 흥행에선 충격적인 성적을 거둔 비운의 영화로 남았다. 영화계 대표적인 나폴레옹 '덕후'는 세계적인 거장 고(故) 스탠리 큐브릭이다. 나폴레옹 영화 만들기는 큐브릭 일생의 프로젝트였다. 나폴레옹 서적만 1만8000권을 모으며 나폴레옹 파기에 몰두했다는 큐브릭의 계획은 그러나 제작이 무산되면서 미완으로 남았다. 큐브릭이 리들리 스콧 버전 《나폴레옹》을 본다면, 뭐라고 말할지 사뭇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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