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품 중단’ 압박에 합의금 주고 소송않겠다 합의…대법 “취소 가능”

이슬비 기자 2023. 12. 17.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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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청사 전경. /뉴스1

납품을 중단하겠다는 공급처 압박으로 합의금을 주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기로 약속했더라도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라면 취소할 수 있다고 대법원이 판단했다.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지난달 30일 자동차 부품업체 A 사가 B 사의 소송수계인(회생관리인)을 상대로 제기한 부당이득금 반환 소송 상고심에서 원심의 각하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1심 법원인 수원지법 안산지원에 돌려보냈다고 17일 밝혔다.

현대차·기아에 자동차 부품을 제조·납품하는 1차 협력업체인 A사는 2차 협력업체인 B사에 부품 생산에 필요한 금형(틀)을 빌려주고 부품을 납품받았다. 두 회사는 2018년 9월부터 부품의 단가 조정, 품질 관리 등 문제로 분쟁을 겪었다. A 사는 공급계약을 해지하겠다고 통보하고 빌려준 금형을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B사는 정산금 지급을 요구하며 반환을 거부했고, 갈등이 계속되면 부품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맞섰다.

A사가 금형을 반환하라며 가처분 신청을 내자 B사는 실제로 부품 공급을 중단했다. 이에 A사는 가처분 신청을 취하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법률적인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합의서를 써줬다. 하지만 2019년 1월 B 사가 정산금과 투자 비용 등을 명목으로 거액을 요구하며 A사에 부품 공급을 지연하자, 결국 A사는 B사에 24억원을 지급하고 금형을 돌려받기로 합의했다. 이때 A사는 B사와 그 임직원을 상대로 어떠한 민·형사상 소송도 제기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A사는 같은 해 6월 B사를 상대로 부당하게 취득한 돈을 돌려달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1·2심 법원은 A사의 청구를 각하했다. 각하는 소송의 형식적인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경우 내용에 대한 판단 없이 재판부가 소송을 종료하는 것이다. 재판부는 B사와 맺은 합의가 적법하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고 봤다.

하지만 대법원은 “(부제소합의는) 위법한 해악의 고지로 말미암은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에 해당한다고 볼 여지가 크다”고 판단했다. 민법에 따르면 사기나 강박에 의한 의사 표시는 취소할 수 있다.

대법원은 “B사 측이 부품 생산에 필요한 금형 등을 반환하지 않은 채 부품 공급을 중단했기 때문에 A사가 정산금 세부내역에 대해 검토하지 못한 채 합의했다”라며 “A사가 합의를 통해 가처분과 민·형사 소송 등 정당한 권리행사를 포기하며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고 봤다. 대법원은 “원심과 1심은 강박에 의한 의사 표시에 대한 법리를 오해해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은 잘못이 있다”고 판단하고, 1심 법원으로 사건을 돌려보냈다. 1·2심에서 모두 각하했기 때문에 다시 1심에서 판단을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한편 B사 대표는 A사를 겁박한 공갈 혐의로 기소돼 유죄가 확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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