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앞두고 대작 뮤지컬이 몰려온다
(시사저널=조용신 뮤지컬 평론가)
한국 공연예술계에서 뮤지컬은 팬데믹 이후 가장 빠르게 기존 시장을 회복한 장르로 꼽힌다. 올 상반기에만 약 2200억원의 매출을 기록했고, 연중 최성수기라고 할 수 있는 연말이 포함된 하반기까지 합하면 5000억원 달성은 무난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의 경우 이태원 참사, 폭우 피해, 배우 갑질 사건, VIP 티켓 가격 인상 등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공연 관람에 영향을 미친 몇몇 사건·사고가 있었지만 올해는 별다른 문제 없이 평온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화제작으로 꼽히는 《오페라의 유령》을 비롯해 흥행을 견인한 대표선수들이 활약한 한 해이기도 했다.
특히 뮤지컬은 한 해의 마지막인 12월 연말 시즌, 저녁 시간대 여가를 의미 있게 보내기에 안전한 문화 소비로 꼽힌다. 현재 흥행이 검증된 라이선스 초연과 재연, 창작 뮤지컬 등 수많은 뮤지컬이 이미 개막해 저마다의 매력과 개성으로 경쟁하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라이선스 뮤지컬 '베스트4'를 소개한다.
8년 만에 돌아온 웨스트엔드의 대표작 《레 미제라블》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은 19세기 프랑스 시민의 비참한 삶과 프랑스 혁명의 태동기를 그린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동명 대하소설이 원작이다. 정치, 사회, 문화, 계급이 요동치는 당시 프랑스 민중의 모순적인 상황을 조망하는 대하드라마로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높은 수준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명작이다. 얼마 전에 온라인 티켓 예매 사이트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이 작품은 가장 높은 비중으로 '뮤지컬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뮤지컬 입문자'에게 추천하고 싶다는 응답을 받은 바 있다. 그만큼 남녀노소 불문 누구에게나 뮤지컬을 초월한 인문학 콘텐츠로서도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영국 출신 글로벌 뮤지컬 프로듀서 카메론 매킨토시, 《미스 사이공》의 창작 콤비이기도 한 작곡가 클로드 미셸 숀버그, 작가 알랭 부빌이 협업한 원작의 오리지널 연출과 무대미술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는 데다, 8년 만에 돌아온 희소성과 함께 한국의 대표 뮤지컬 배우들이 출연한다는 점에서 연말 흥행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2013년 라이선스 초연, 2015년 재연으로 총 60만 명의 관객을 모았고 이번이 세 번째 시즌이다. 10월에 부산 드림씨어터 개막 이후 11월에 서울로 입성했다. 주인공 장발장 역에는 민우혁과 최재림이, 자베르 경감 역에는 김우형과 카이가 출연 중이다. 2024년 3월10일까지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에서 열린다.
세기말을 상징하는 브로드웨이 영원한 명작 《렌트》
미국의 젊은 뮤지컬 작곡·작사가 조나단 라슨의 인생을 담은 영화로 작년 겨울에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틱틱붐》은 뮤지컬 팬들에게 많은 화제가 됐다. 젊고 뛰어난 능력자였지만 가난한 아티스트였던 그의 인생이 이후 '렌트(Rent)'로 이어진다는 내용 덕분에 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그는 1996년 1월26일, 뉴욕 소극장 뉴욕시어터워크숍에서 작품의 첫 정식 공연을 앞두고 대동맥 박리라는 희귀병으로 사망했다. 당시 배우들은 대부분 신인이었는데 자신들의 대사와 곡을 써준 아티스트를 가슴으로 추모하며 개막 공연을 했다. 이때 모아진 특별한 에너지가 이 작품을 전설로 만들어주었다. 관객과 평단의 일치된 찬사로 인해 《렌트》는 퓰리처상을 비롯해 토니상까지 휩쓸었다.
이 작품의 주제는 조나단 라슨의 생전 철학을 담았다. 주변을 돌아보고 약자들을 사랑하라는 휴머니즘이다. 플롯과 캐릭터는 오페라 《라보엠》에서 가져왔고, 형식은 공동체 생활을 중시하는 1960년대 히피문화에서 가져왔다. 초연 당시 이 작품에 담겼던 가난한 예술가의 주거, 세입자 갈등, 홈리스, 동성애, 마약 등의 문제들은 현재도 여전히 진행형이지만 이 작품은 인간 내면의 휴머니즘을 유일한 대안으로 제시한다.
2020년 한국 공연 20주년 프로덕션 이후 3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주요 배역은 모두 더블캐스트로 진행된다. 어떤 조합을 선택해도 만족스러울 정도로 배역과 잘 어울리는 캐스팅이다. 로저 역(장지후, 백형훈), 마크 역(정원영, 배두훈), 미미 역(김환희, 이지연), 엔젤 역(김호영, 조권), 모린 역(전나영, 김수연), 조앤 역(정다희, 배수정) 등. 2024년 2월25일까지 코엑스 신한카드 아티움에서 열린다.
9·11 사건을 소재로 인류애가 충만한 《컴 프롬 어웨이》
이번 연말 시즌에 유일한 대극장 라이선스 초연 작품인 《컴 프롬 어웨이》(Come From Away)도 최근 브로드웨이를 대표하는 명작 중 하나다. 이 작품은 소재가 매우 특별하다. 바로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을 9·11 테러이기 때문이다.
2001년 9월11일 오전, 테러범들이 납치한 4대의 비행기 중 2대가 뉴욕 최고층 건물인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에 충돌해 엄청난 사상자를 낸 사건이 발생했다. 전 세계는 큰 혼란과 충격에 빠졌다. 비상 상황이 선포되고, 미국 영공이 폐쇄되면서 전 공항에 착륙이 금지됐다. 비행기 38대는 캐나다의 작은 마을인 뉴펀들랜드 갠더공항에 '노란 리본 작전'의 일환으로 비상착륙하게 됐다. 마을 주민은 약 7000명에 달하는 승객 숫자보다도 적었다. 이들이 합심해 승객들을 마을에 수용하고, 그들이 무사히 각자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도록 도움을 줬던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 작품은 그 과정을 특별한 형식의 뮤지컬로 풀어냈다.
마을 주민들은 이방인인 여행객들의 의식주는 물론, 심신의 안정을 회복시켜주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그 과정에서 각기 다른 국적과 인종에서 오는 긴장과 갈등의 불씨도 더 큰 가치인 인류애로 감싸안았다. 이 작품은 마을 주민들이 공공시설을 개방해 숙소를 마련해 주고 홈스테이, 레크리에이션도 함께 하면서 승객들과 비극 속에서도 유쾌한 공동체를 이뤄가는 과정을 담았다. 초연 당시 뉴욕 현지 관객과 평단들은 일제히 "암울한 시기에도 인간의 친절함을 담을 수 있는 능력과 증오에 대한 인류의 승리를 음악과 함께 잘 표현했다"고 극찬을 보냈다.
특히 12명의 배우가 마을 사람과 승객을 모두 연기하면서 무대만이 가진 '다역 연기'의 특징을 잘 표현해 준다. 남경주, 최정원, 최현주, 차지연, 신영숙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주연급 배우들도 예외 없이 이 작품에서는 앙상블을 겸하며 무대를 가득 채워주는 모습은 공연예술만이 가진 매력을 물씬 느끼게 해준다. 2024년 2월18일까지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열린다.
10주년 맞은 치명적인 매력의 《드라큘라》
2014년 초연 이래 시즌마다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드라큘라》가 올해로 10년째 공연을 이어가며 다시 한번 관객과 만난다. 《지킬 앤 하이드》의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의 작품으로 2004년 브로드웨이 초연 이후 세계 여러 나라에서 라이선스 공연을 가졌다. 이 작품은 특히 우리나라 프로덕션을 위해 새롭게 곡이 추가되기도 하고, 브로드웨이 버전보다 더 웅장한 4중 회전 무대가 도입되면서 주목을 받았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0년에도 흥행 열기가 지속됐고, 초연부터 계속 참여해온 김준수 배우의 인기가 높아 해외팬도 많이 찾는 작품이다.
원작은 아일랜드의 작가 브램 스토커가 쓴 1897년작 소설 《드라큘라》(Dracula)로 흡혈귀 드라큘라 백작이 주인공이다. 배경은 19세기 말이다. 흡혈귀가 돼 남의 피로 영생을 구하는 드라큘라 백작은 자신의 저택 트랜실바니아성에 도착한 젊은 변호사 조나단의 약혼자 미나에게서 천 년 전에 죽은 연인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녀를 쟁취하기 위해 애쓰는 이야기다. 자신의 영원불멸한 사랑을 얻기 위해 타인의 삶을 짓밟는 악인이지만, 결국 진정한 사랑 앞에서 자신을 버릴 줄 아는 로맨틱한 희생 아이콘으로서의 드라큘라의 매력이 중심에 있는 작품이다. 강력한 주인공 캐릭터이기에 그가 부르는 노래와 무대 위의 모든 움직임이 작품의 전체 서사를 주도적으로 이끄는 독특한 작품이기도 하다.
대극장이지만 복합 심리적인 연기가 요구되는 작품답게 가창력은 물론이고 입체적인 카리스마가 있는 배우들만이 이 작품에 출연할 수 있다. 이번 공연에서 드라큘라 역은 김준수, 전동석, 신성록이 맡았고 상대인 미나 역으로는 임혜영, 정선아, 아이비가 나온다. 2024년 3월3일까지 샤롯데씨어터에서 공연된다.
그 외에도 유쾌한 수녀들의 이야기를 다룬 동명의 영화를 각색한 《시스터 액트》 투어 공연(2024년 2월11일까지 디큐브 링크아트센터),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인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원작으로 하는 《몬테 크리스토》가 새롭게 단장한 이번 시즌 공연(2024년 2월25일까지 충무아트센터 대극장)도 연말을 수놓고 있는 주요 인기작 목록에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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