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게 내 계좌로 불법행위…수천억 손실 돌려막기 하다 ‘덜미’

[사진=매일경제]

증권사들이 채권형 랩어카운트(랩)·특정금전신탁(신탁) 상품을 운용하면서 고객 간 손실을 전가하는 등 여러 위법행위를 저지른 점이 금융감독원 검사에서 적발됐다.

17일 금감원은 증권사 9곳(교보·미래에셋·유진·키움·하나·한국투자·KB·NH·SK)을 대상으로 채권형 랩·신탁 업무 실태를 점검한 결과 다수의 위법사항과 리스크 관리, 내부통제상 문제점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금감원은 지난 5월부터 9개 증권사의 업무 실태를 검사했고, 모든 증권사에서 예외없이 위법 행위가 발견됐다.

실제로 A증권사는 지난해 7월 이후 다른 증권사와 총 6000여 회의 연계·교차거래를 통해 특정 고객 계좌의 기업어음(CP)을 다른 고객의 계좌로 고가에 매도했다. A증권사가 특정 고객들의 목표수익률을 맞춰주기 위해 이와 같은 방식으로 다른 고객들의 자산에 부당한 손실을 끼친 금액은 모두 합해 5000억원 수준이다.

채권형 랩·신탁은 증권사가 고객과의 1:1계약을 통해 자산을 운용하는 상품이다. 펀드와는 달리 개별 고객의 투자목적과 자금수요를 감안한 단독 운용이 특징이다. 따라서 랩·신탁 상품을 운용할 때 특정 투자자의 이익을 해하면서 자기 또는 제3자의 이익을 도모해서는 안된다.

금감원 관계자는 “금융투자업자는 원칙적으로 사후에 투자자에게 이익을 제공해서는 안된다”면서 “일부 증권사는 랩·신탁 만기때 목표 수익률을 달성하기 어려워지자 대표이사를 비롯한 주요 경영진의 결정 하에 이 같은 불법을 저질렀다”고 설명했다.

금감원은 이같은 사례가 무더기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고객간 손실전가를 일으킨 운용역은 9개 증권사에 30명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점검결과 특정 고객 계좌의 손실을 다른 고객에게 전가하거나, 증권사의 고유자산을 통해 보전해주는 식의 중대한 위법 사실이 있었다고 금감원은 밝혔다.

금감원은 “비정상적인 가격의 거래를 통해 고객에게 손해를 전가한 행위는 판례에 따를 때 업무상 배임 소지가 있는 중대 위법행위에 해당한다”면서 “주요 혐의 사실을 수사당국에 제공할 방침”이라고 했다.

금감원은 증권사가 운용기간이 만료된 이후에도 고객의 계좌에서 CP를 고가에 매입해주는 방식으로 목표 수익률을 억지로 맞춰준 사실도 확인했다. B증권사는 다른 증권사에 가입한 특정금전신탁을 통해 2022년 11월에서 같은 해 12월 중 고객의 랩·신탁 계좌에 있는 CP를 고가에 매수해주는 방식으로 총 1100억원 규모로 부당하게 이득을 전가했다.

증권사들은 고객과의 랩 계약시 운용 가능한 자산의 잔존만기 한도를 1년으로 제한하기로 약속하고도 잔존만기가 4년인 회사채를 편입해 운용하기도 했다. 또 운용 가능한 자산의 신용등급을 AA+로 제한하기로 약정하고도 AA-인 회사채를 편입하기도 했다.

또 고객의 동의 없이 한 고객의 서로 다른 계좌간 자전거래를 통해 목표수익률을 달성하기도 했다. 일부 증권사는 고객 자산의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고유자금으로 펀드를 설정하고 특정 채권, CP를 고가매수하는 방식으로 수익률을 억지로 끌어맞추기도 했다.

당국이 점검에 나선 것은 작년 하반기 자금시장 경색으로 인한 랩·신탁의 환매중단 사태가 있었기 때문이다. CP 등 랩·신탁 편입자산을 시장에서 매도하기 어려워졌다.

금감원 고위 관계자는 “이번 검사 결과 확인된 위법행위를 신속히 조치해 랩·신탁 시장 질서를 확립하겠다”면서 “운용상 위법행위로 손실이 발생한 랩·신탁 계좌에 대해서는 금투협회와 증권업계가 협의해 객관적인 가격 산정 및 적법한 손해배상 절차 등을 통해 환매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