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밀아, 함부로 위로하지 않고 대신 울어주다…'리버사이드'

이재훈 기자 2023. 12. 17.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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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만의 정규 음반…'현재성'·'현재감'을 담은 역작
"제가 계속 흐를 생각을 먼저 하는 게 가장 기본"
[서울=뉴시스] 정밀아 정규 4집 '리버사이드' 커버. (사진 = 뮤지션 측 제공) 2023.12.17.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싱어송라이터 정밀아의 노래는 유독 공간적이고 공감각적이다.

그녀가 몸 담고 있는 지역성이 배어 있고, 현재 고민 중인 내용들이 동시감각을 통해 공감대의 폭을 넓힌다. 최근 발매한 정규 4집 '리버사이드' 역시 스스로 거룩하기 힘든 세상에서 스스로 흐르고자 하는 정밀아의 의지가 만들어낸 산물이자 역작이다.

비겁한 세상에 대한 냉철한 이성적 공부 끝에, 함부로 위로하지 않은 신중함을 택하며 아픈 자들을 대신해 울어줄 수 있는 살풀이. 그건 타인 혹은 타인의 이야기를 경솔하게 재단하지 않고, 소리와 말과 마음을 귀하게 여겨 현재를 왜곡하지 않고 기록한 시대의 일지가 된다. 정밀아의 노래는 그렇게 '강력한 현재감'을 동반한 일종의 체험이 된다. 다음은 최근 공덕역 인근에서 만난 정밀아와 나눈 일문일답.

-지난 앨범도 마찬가지지만, 이번 앨범은 유독 더 고민을 많이 하신 듯합니다.

"일단 여러 가지 환경이 바뀌었죠. '어떻게 계속 내 이야기를 이어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1집, 2집, 3집은 비교적 그게 수월하게 떠올랐어요. 4집은 노래를 계속 만들고는 있었는데, 그걸 하나로 모으는 무엇인가가 없어서 고민을 많이 했거든요. 그러다 앨범의 시작이 된 마포대교 위의 장면을 제가 만나버린 거예요. 전에 해놓은 걸 다 폐기하고 그때부터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죠. 근데 주제가 너무 넓었어요. 어떤 슬픔에 대해 얘기한다는 게 조심스럽고요. 타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 전쟁 이야기에 대해 '한낱 작은 음악가가 할 수 있는 이야기인가'라는 생각도 들고…. 음악가의 태도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야 되니까 머리가 복잡해져서 많이 어려웠죠."

-우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건 어렵고 아픈 일이라는 걸 노래하는 여섯 번째 트랙 '운다'가 그 중에서도 가장 진중한 트랙입니다. 무려 7분31초짜리 장대한 곡이죠.(전쟁터의 굉음들, 난민보트위의 절규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곡을 쓰기 위해서 이것저것 찾아본 것에 대한 알고리즘이 많은 역할을 했어요. 보여지는 이야기에 대해 외면을 못하겠더라요. 이미 내 눈에, 내 마음에 콕 들어와 버린 이야기들에 대해 노래로 무엇이든 하고 넘어가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 자료들을 보고 사람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건 정말 말이 안 되잖아요. 심리적으로 어려웠던 것 다음으로는 음악적인 부분에 있어서 이야기의 균형을 맞추는 게 쉽지 않았어요. '이야기를 잘 들리게 할 것인가?' 아니면 '신선한 연주 방식을 택할 것인가' 등에 대한 고민이 필요했죠. 전작들을 통해 제가 더 잘할 수 있겠구나 싶었던 걸 더 잘하려 했고, 이야기에 집중해야 되는 거면 이야기 전달에 더 뭐 비중을 싣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서울=뉴시스] 정밀아 '한강엘레지'. (사진 = 뮤지션 측 제공) 2023.12.17.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지난한 현실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한 흔적들이 많아서 더 대단한 음반이라고 느껴졌습니다.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보는 일은 어렵잖아요. 외면을 한다거나 고개를 돌리거나 하죠. 몇 년 전 서울역 근처에서 우는 사람 몇 명을 봤어요. 울음을 도저히 못 참는 청년을 봤고, 공중전화 부스에서 수화기를 든 허리 굽은 할머니 한 분이 힘겹게 울고 있는 걸 또 봤죠. 그 장면들이 잔상으로 꽤 오래 남았거든요. 그래서 '우는 사람들'을 머릿속에 계속 담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전쟁을 소셜 미디어와 유튜브 등에서 보게 됐고, 음악가를 넘어 사람으로서 왜 사람들이 울어야 하는지를 알아야겠다고 생각해 계속 관련 자료들을 찾고 보게 됐죠. '네가 뭔데 전쟁에서 우는 사람들을 음악에서 다뤄'라는 말이 나올 수도 있어요. 그래서 굉장히 조심스러워 했고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적어도 전 음악이라는 저장 매체를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거기에 담아 놓으면 누군가에 환기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현재성이라고 할까요. '이런 모습이 세상 어디엔 있다'에 대한 기록이라고 생각해요."

-'리버사이드' 산책 중에 마포대교 위를 건너면서 마주한 장면이 이번 음반의 시작이라고요.

"청파동에 살다가 작년 7월 서울 마포대교 북단 근처로 이사했어요. 그 해 9월 마포대교를 건너는데 여의도 쪽으로 가는 방향에 '생명의 전화'가 있어요. 그 바로 밑 난간에 국화꽃 한다발이 걸려있는 거예요. 순간 아찔했죠. IMF 때부터 마포대교에 대해 들어온 수많은 얘기들. 국화꽃이 누구에 대한 애도로 달아 놓은 거라고 추측을 할 수 있잖아요. 하루를 편안하게 마감을 하려고 느릿느릿하게 산책을 하고 있다가 그 장면을 보니까 제 몸이 너무 굳어지는 기분이었어요."

-앨범 발매 주기가 3년입니다.

"2집을 만들면서 더 확신을 갖게 됐는데, 앨범을 제가 가을에 내거든요. 연말까지는 앨범 관련 무엇이 많아요. 그리고 두 번째 해는 진짜 공연만 하면서 다음 앨범에 대한 워밍업을 하는 거죠. 마지막 해에는 10월에 앨범 작업을 끝내야 되니까 연초부터 진짜 본격적인 작업을 하고. 이렇게 3년을 보내니까 저한텐 적절했어요. 급하지 않은데 약간 긴장감도 있고. 제가 다작을 하지 않는 편이잖아요. 3년이면 팬분들도 기다려주실 만한 기간인 거 같아요."

-이번 앨범은 서사도 주목할 만하지만, 무엇보다 공간감이 느껴지고 공감각적이라서 좋았어요. 내용적인 측면도 그렇고 사운드적인 측면에서도요. 3집 '청파소나타'는 전에 사시던 청파동의 공간감이 잘 느껴졌고 이번 4집 '리버사이드' 역시 이사하신 공간에 대한 공감각적인 측면이 잘 느껴지는데요. 공간이 음반에 미치는 영향들이 분명 있죠?

[서울=뉴시스] 정밀아 '서술'. (사진 = 뮤지션 측 제공) 2023.12.17.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한강은 제가 워낙 옛날부터 많이 다녔던 곳이기는 해요. 20대 때부터 '한강에 대한 노래를 언젠가는 한 곡 쓰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다 이 근처 동네(마포대교 북단)로 이사 오면서 '한강에 대한 뭔가는 하나 있겠구나' 막연하게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 근데 대놓고 '리버사이드'(Riverside·강가)가 될 줄은 저도 몰랐죠. 한강 다리를 건너는 일들은 완전히 다른 시각적인 느낌을 줘요. 이렇게 큰 서울에서 이렇게 넓은 강을 매일 보는 것만으로도 어떤 감정적인 작용이 있는 거 같고요."

-이번에 믹싱, 마스터링은 새로운 분들과 함께 하셨다고 했는데 어떤 질감에 가장 신경 쓰셨나요?

"'리버사이드'를 들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전체적으로 사운드 폭이 넓거든요. '리버사이드'가 첫 믹스였는데 오혜석 기사님이 드럼 소리를 제가 이제까지 했던 음악보다 훨씬 세게 잡아주신 거예요. 이렇게 하셨을 때는 '뜻이 있었겠지' 싶어서 계속 가지고 갔는데 정말 엄청 좋은 거예요. 무엇보다 처음부터 끝까지 곡이 힘을 잃지 않고 가니까 설득력이 있더라고요. 앰비언스 레코딩에 대한 밸런스도 좋았고요. 마스터링도 되게 재미있었어요. 성지훈 기사님이 제 3집 앨범을 너무 잘 들으셨고 그래서 음반까지 갖고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작업에 기대를 하셨고요. 엄청 공들여서 즐겁게 하셨대요. 너무 감사했죠."

-무엇보다 사운드가 '지금의 소리' 같아요. 첫 트랙 '장마'를 여는 빗소리 등 앰비언트 요소가 곡에 잘 녹아들어가 있어요.

"현장감, 입체감도 있지만 '현재감'이라는 것이 떠올렸거든요. '내가 공감각으로 뭔가를 받아들일 때 현재를 기록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뭘까?'라는 고민을 했는데, 그 중 하나가 마치 연주의 한 부분인 양 소리들을 넣는 거였어요. 그 소리들은 진짜 열심히 녹음했어요. 같은 빗소리더라도 앞 베란다에서 녹음하는 소리와 뒤 베란다에서 녹음하는 소리가 다르거든요. 또 보통 베란다 문이 두 겹이잖아요. 두 겹을 다 열고 녹음한 소리, 한 겹만 열어놓고 녹음하는 소리가 다르죠. 전철 소리도 1호선, 4호선 소리가 다 다르고요."

-앨범에 실린 모든 곡이 좋았지만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트랙 '서술'이 너무 좋았어요. '잘 들어봐. 내가 지금부터 이런 저런 얘기를 해줄게'라고 얘기하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딱 그거예요. 원래는 지금보다 더 친절하고 더 상냥하게 더 안부를 전하는 내용의 가사였어요. 그런데 너무 오글거려서 '이건 좀 아니다' 싶어서 조금은 더 담담하게 바꿨어요. 이 트랙부터 40~50분간 계속 얘기를 할 텐데 현재 제가 어떤 사람인지는 저도 스스로 알아야 되잖아요. 그래서 제가 현재 어떠한지에 대해 가득 적었어요. 그 다음에 이야기와 각 문장들이 잘 이어지고, 노래 부르기 좋게 잘 다듬었죠."

[서울=뉴시스] 정밀아 '좋은 아침 배드민턴 클럽'. (사진 = 뮤지션 측 제공) 2023.12.17.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사랑은'이라는 노래엔 '사랑'이라는 단어가 정말 많이 들어갑니다.

"사랑에 대해 대놓고 쓴 노래예요. 사랑에 대한 생각이나 정의랄까 그것이 계속 변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이 곡, 이 얘기가 이번 음반에서 없었으면 한없이 무겁기만 했을 거 같아요. 또 음반 부제가 '계속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자연에 기댄 마음'인데 이 문장을 정말 문장답게 만들려면 사실 '사랑'이 있어야 했어요."

-이번 앨범을 내시고 더 이상 한강에 대한 노래는 내지 않아도 되겠다는 느낌을 혹시 받으셨나요?

"'더 써야지 덜 써야지' 같은 생각은 잘 모르겠어요. 일단 이번 앨범에 담길 만큼의 이야기는 했다 싶어서 일단락 했죠. 제가 이사를 가지 않으면 또 여기서 뭔가 변함없는 것들을 보고 노래하고 할 텐데요. 또 어떤 이야기가 더 나올지는 모르겠습니다. 제 1집에 실린 '방랑'에 '다리를 건너 폭포를 지나도 / 찬란한 세계가 있지는 않을 거야'라는 가사가 있는데, '리버사이드'의 '음- 다리를 건너도 찬란한 세계 있진 않고'라는 가사의 문장과 뜻하는 바가 똑같거든요. 제 이전 노래를 아시는 분들은 이런 재미를 느끼실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듭니다."

-노랫말을 되게 귀하게 쓰신다는 느낌이 들어요.

"가사는 영원히 남아 있잖아요. 500번 고칠 게 있으면 600번을 고치고 601번까지 고쳐봐요. 초안을 보면 정말 오글거려서 못 사용해요. 그래서 방 안에 가사를 쓴 종이를 계속 붙여 놓고 들여다 보는 거예요. 그리고 노래를 만들 때 명분에 기대지 않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되게 많이 해요. '내가 뭔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의식 과잉에 빠지면 큰일이 나거든요. 절대 그러면 안 되기 때문에 내가 아는 것만큼만 쓰자는 생각도 있죠."

-그런 부분이 사람에 대해서나 특정 상황에 대해서나 예의를 갖추는 느낌입니다.

[서울=뉴시스] 정밀아 '리버사이드'. (사진 = 뮤지션 측 제공) 2023.12.17.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이건 널 위한 거야'라고 이야기하면 폭력적일 수 있어요. 어떻게 보면 누군가에겐 상처를 줄 수 있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는 거죠. 예술가라고 해서 무슨 면죄부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만약에 일반적인 기준을 넘어서는 걸 다룰 때는 그걸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굉장히 많은 밑작업들이 있어야 해요. 설득력을 갖출 수 있도록 더 많은 공부를 해야죠. 함부로 '예술적 허용'에 기대면 안 되는 거죠."

-앨범 발매 이후 활동은 어떻게 됩니까?

"앨범 발매 기념 공연은 몇 달 있다가 할 거예요. 앨범을 낸 뒤 3개월 안에 발매 공연하고 그러면 개인적으로 큰 숨을 너무 한번에 다 내몰아 쉰 느낌이 들어서요. 그리고 앨범과 공연이 너무 한 세트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포맷을 좀 더 키워서 새로운 구성원들 함께 하고 싶어요. 또 제가 혼자 기타 들고 공연을 많이 하잖아요. 이 형식도 테마를 잘 잡아서 체계를 갖추고 싶고요. 그렇게 투 트랙으로 공연을 하고 싶어요."

-긴 호흡으로 가는 게 좋습니다.

"제 노래가 계속 이렇게 흐른다고 생각을 하면 천천히 가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전작들도 그렇고 이번 앨범도 그렇고 '아주 새로워야지'라는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큰 충격이나 고난을 겪지 않고서는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완전히 새로운 걸 갖고 나오기 힘들죠. 대신 3집 때도 그랬고 이전보다 '30%는 변화를 주자'는 마음으로 덤벼 들어요. 무엇보다 저라는 사람 자체가 고여 있지 않고 계속 흐른다면 절대 똑같은 건 안 나올 거라는 믿음이 있고요. 제가 계속 흐를 생각을 먼저 하는 게 가장 기본인 거 같아요. 아티스트 자체가 계속 흐르는 사람이면, 그 결과물도 계속 강처럼 흐르겠죠."

☞공감언론 뉴시스 realpaper7@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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