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을까 [영화와 소설 사이]
런던에 거주하는 중년 남성 토니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어느 날, 40년 전 여자친구 베로니카의 어머니가 사라가 사망했다는 슬픈 편지를 받습니다. 이 편지엔 사라가 토니에게 유품을 남겼다는 놀라운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20대 시절 잠시 연인관계였던 전 여친과 오랜 세월 연락을 나누지 않았는데, 고작 잠깐 스쳐지나갔을 뿐인 ‘아주머니’ 사라가 자신에게 유품을 남겼다는 소식은 놀라웠습니다. 심지어 토니에게 남겨진 유품은 일기장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일까요.
원작자 줄리안 반스는 이 소설로 2011년 맨부커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영화/소설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이 영화/소설의 결말에 이르면, 처음부터 다시 봐야 하기 때문이다”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의 수작이었지요. 오늘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여행합니다.
(※이 글에는 영화와 소설의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토니는 중고 카메라를 판매·수리하는 상점을 운영하는 영국인 남성입니다. 20대 시절의 옛 연인 베로니카가 어머니 사라의 유품 전달을 반대하면서 토니와 베로니카 사이의 작은 갈등이 시작됩니다. 베로니카는 토니를 만나주지도 않습니다. 수소문 끝에 어렵사리 재회한 베로니카는 “일기장을 이미 태워버렸다”고 대꾸합니다.
그 과정에서 토니는, 사라가 토니에게 남긴 일기장이 사라의 일기장이 아니라, 토니 자신의 고교 동창이자 오래 전 자살했던 친구 에이드리언이 남긴 일기장이란 사실을 접하게 됩니다.
베로니카와 사귀던 토니는, 에이드리언에게 베로니카를 소개했습니다. 그건 ‘잘못된 만남’이었습니다. 에이드리언에게 “네 여자친구 베로니카와 사귀게 되었다”는 끔찍한 편지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머리가 희끗한 노인이 된 토니는, 그 시절 자신이 두 사람에게 ‘열애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글이 적힌 ‘쿨’한 답장을 보냈다고 기억합니다. 그러나 토니의 편지를 받은 에이드리언은 긴 시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 욕조에서 자살했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나서, 느닷없이, 베로니카의 어머니인 사라가 자신에게 일기장을 남겼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소식을 들은 것이었습니다.
왜 사라는 토니에게 일기장을 남겼을까요. 게다가 베로니카는 또 왜 일기장을 주지 않으려는 걸까요.
의문스러운 한 권짜리 일기장, 그리고 그 일기를 썼던 오래 전 자살한 친구. 자신을 배신했던 여자친구와 그의 어머니. 토니 앞에 부메랑처럼 다가오는 진실은 완전히 뒤엉킨 상태입니다.
토니의 편지는 강력한 저주처럼 훗날 끔찍한 결과를 낳습니다. 에이드리언은 베로니카의 ‘젊은’ 어머니 사라를 만났다가 관계가 깊어져 임신(!)이 되었고(에이드리언의 아이를 베로니카의 모친 사라가 임신), 베로니카는 옛 남자친구 에이드리언과 엄마 사라의 아들, 그리고 자신의 약 20년 터울인 남동생을 ‘평생’ 부양해야 했습니다. 이게 사건의 전말입니다.
토니의 편지에 이 모든 내용이 ‘예.언.처.럼.’ 담겨 있었습니다.
영화 속 한 장면. ‘아직’ 연인이었던 토니와 베로니카가 호숫가에 차를 주차합니다. 두 사람은 뒷좌석에서 사랑을 나눕니다. ‘미래에 관한 두려움, 관계에 대한 확신.’ 연인 사이엔 그런 얘기도 오갔습니다.
정육면체 주사위는 서로 마주보는 두 면의 숫자 합이 7입니다. 1이 적힌 면의 반대쪽 면에 6이 적히는 식이지요. ‘2와 5’, ‘3과 4’도 쌍을 이룹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세계 공통입니다. 그런데 베로니카 쪽의 주사위는 다릅니다. 인접한 세 개 면의 숫자가 ‘5, 2, 2’입니다.
일단 숫자 2가 두 번 나온다는 점도 이상한데, 무엇보다 주사위 배치상 5와 2는 인접할 수가 없거든요. 정육면체 주사위의 숫자 5는 ‘1, 3, 4, 6’과 맞닿아야 정상입니다. 토니 쪽의 주사위 세 개 면의 숫자는 ‘1, 2, 3’인데, 이건 정상입니다.
(물론 이 문제에 ‘정답’이란 게 있을 순 없습니다. 하지만 스크린에 나오는 모든 사물에 무의미한 건 없습니다. 연출자 의도가 치밀하게 계산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저렇게 좁은 차량에서 중심인물 사이에 놓인, 눈길을 사로잡는 큼직한 두 개의 주사위가 아무 이유도 없이 배치되긴 어렵습니다.)
토니가 바라본 세상의 질서는 대체로 반듯합니다. 토니를 둘러싼 세계의 인과(因果)는 논리정연합니다. 토니의 삶도 그렇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출근하고, 제품(중고 카메라)을 구입할 의사가 적은 손님의 질문은 달갑지 않습니다. 어른들이 얘기할 땐 카페에서 꼬마들이 제멋대로 떠들어서도 안 되지요. 모두 작품에 스쳐 지나가듯 나오는 장면입니다.
‘규율과 규범에서 벗어나지 않기.’ 그런 토니에겐, 베로니카가 일기장을 주지 않는 이유도 논리적으로 해석되어야 했습니다. ‘1, 2, 3’ 숫자가 보이는 ‘정상적인’ 주사위처럼 말이지요.
토니 머릿속에선 이런 논리가 성립했기 때문입니다.
‘에이드리언과 동침했던 스무 살 베로니카가 임신했다 → 에이드리언은 충격으로 자살했다 → 사라가 나(토니)에게 남긴 일기장은 베로니카 남편인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이다 → 따라서 나는 그 일기장을 달라고 주장할 권리가 없다.’
토니는 이런 생각을 베로니카에게 전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차가웠습니다. “아직도 전혀 감을 못 잡는구나. 그냥 포기하고 살지 그래.”(246쪽, 베로니카의 이메일)
‘나(베로니카)는 에이드리언을 사랑했다’, ‘나는 에이드리언의 아들을 돌보고 있다’, ‘에이드리언의 아들은 나의 아들이 아니라 나의 동생이다’, ‘에이드리언을 낳은 건 내가 아니라 나의 엄마 사라다’, ‘내 어머니가 내가 사랑했던 남자친구의 아이를 낳았다’ 등 말이 안 되는 명제들이 뒤엉킨 삶이었으니까요.
숫자 ‘5, 2, 2’가 뒤엉켜 있던, 훗날 기억도 못하게 될 젊은 시절 저 주사위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카메라의 본질은 ‘기억을 붙잡는 도구’입니다. 하나의 상을 백지에 맺히게 한 뒤 인화된 이미지로 기억을 박제하도록 해주는 도구 말이지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카메라 렌즈에 투영된 모든 빛은 ‘굴절된’ 상입니다. 카메라 렌즈가 사람의 안구와 같다고 볼 때, 이 인위적인 안구는 상을 왜곡하는 과정을 통해 이미지를 만듭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주제인 ‘기억의 윤색’에 더없이 어울리는 사물이지요. 토니가 자신의 기억을 ‘비의도적으로’ 굴절시키고 왜곡함으로써 이 모든 일이 벌어졌으니까요. 영화에 나오는 토니의 카메라 상점은 소설에선 단 한 줄도 언급되지 않는데, 참 멋진 각색입니다.
그럼에도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희망적입니다. 편집된 기억일지라도, 우리는 다시 그 기억을 재생하며 원형에 가깝도록 복원하고, 이로써 제자리를 찾은 기억으로부터 살아갈 힘을 얻으니까요.
토니가 중고 라이카 카메라를 ‘판매’만 하지 않고 동시에 ‘수리’하기도 한다는 점, 그것이 이 작품이 남기는 유일한 희망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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