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 엄마 문란하잖아”…딸에게 막말한 이 아빠, 잡스였다니 [씨네프레소]
박창영 기자(hanyeahwest@mk.co.kr) 2023. 12. 17. 09:09
[씨네프레소-105] 영화 ‘스티브 잡스’
*주의: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를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다’고 평가하는 건 공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세상엔 ‘좋은 아버지’까지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자기 책임을 다한 ‘평범한 아버지’도 많기 때문이다. 잡스에겐 사실 ‘나쁜 아버지였다’는 평가가 더 공평하다. 딸이 그에게서 받은 상처를 고려한다면 말이다.
물론 당신은 누군가를 그토록 쉽게 ‘나쁜 아버지’라고 비난해도 되냐고 질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리사의 아버지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기자에게 “미국 남성 28%가 리사의 아버지가 될 수 있다”고 얘기했다. 자신과 한때 잠자리를 가졌던, 딸의 엄마가 문란한 여성임을 암시하는 듯한 발언이다. 커서 그런 인터뷰를 본 딸의 마음은 어땠을까.
‘스티브 잡스’(2015)는 최고의 혁신가였던 스티브 잡스의 프레젠테이션(PT) 무대 뒤를 비춘 작품이다. 스티브 잡스 하면 PT부터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PT 무대는 사업가로서 그의 에너지가 폭발적으로 발산된 곳이었다. 영화는 바로 그 무대의 이면을 조명하며 세계 IT 산업의 영웅이었던 잡스와 주변 사람들로부터 야박하단 평가를 받던 인간 잡스의 모습을 대비한다.
딸을 인정할 수 없었던 아버지 잡스, 애 엄마가 문란하다고 주장
플롯을 자세히 살펴보자. 영화는 스티브 잡스에게 중요했던 세 가지 PT 무대 준비 과정을 담는다. 바로, 1984년 매킨토시를 세상에 처음 공개하던 날, 그리고 1988년 애플이 아닌 넥스트의 CEO로서 새 제품을 발표하던 날, 마지막으로 1998년 애플 아이맥을 세상에 소개하던 날이다. 그는 컴퓨터 업계 역사를 바꿀 사건이라고 생각하고 각 PT를 준비한다.
그토록 중요한 행사였기 때문에 완벽주의자 잡스는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영화는 무대 뒤에서 몰아치던 소용돌이를 묘사한다. 그는 준비가 미흡한 직원에겐 ‘무대 위에서 망신을 주겠다’는 폭언을 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마케팅 담당자 조안나 호프만(케이트 윈슬렛)과 애플 공동창업자 스티브 워즈니악(세스 로건)도 그의 성격에 혀를 내두른다.
무엇보다도 영화는 아버지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던 잡스의 어두운 면을 보여준다. 그는 브레넌이라는 여성과의 사이에서 리사를 가졌다. 처음 브레넌이 리사를 데려와 잡스의 딸이라고 알렸을 때, 그는 이를 부인하고, 브레넌이 다른 남자들과 관계를 가졌다는 증거를 찾는 데 상당한 에너지를 쏟는다. 친자 확인 검사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타임’지 기자에게 “미국 남성의 28퍼센트가 리사의 아버지일 수 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브레넌의 남자관계가 복잡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리사와 친모 브레넌에게 큰 상처로 남았음은 물론이다.
후에 잡스는 당시 아버지가 된다는 걸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며, 기이한 주장을 했던 걸 후회한다고 밝혔다. 잡스가 후회한다고 공식적으로 언급한 몇 안 되는 사건이다. 그는 1991년 로런 파월 잡스와 결혼한 이후에야, 리사를 딸로 받아들인다. 물론, 그전에도 개발 중인 컴퓨터 이름을 ‘리사’로 지었던 걸로 봤을 때, 딸을 향한 애정은 계속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를 표현하고 인정하는 데 심각한 결함이 있었던 것이다.
역사를 그대로 드러내는 데는 실패, 잡스를 묘사하는 데는 성공
이 영화엔 많은 왜곡이 있다. 세 가지의 사건에 잡스의 성격과 인생을 압축해서 넣다 보니 실제론 없었던 대화를 삽입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실존 인물 중 상당수가 영화의 허구성을 지적했고, 때론 불편함을 드러낸 경우도 있었다.
그건 이 영화 각본을 집필한 작가 아론 소킨의 특징이기도 하다. 소킨은 극영화의 핵심은 사건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데 있다고 믿지 않는 작가다. 그는 영화가 설명적으로 늘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핵심 사건에만 집중하되, 과거사 중 반드시 언급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부분은 빠른 대사로 처리해버린다. 마크 저커버그 메타(구 페이스북) 창업자를 다룬 ‘소셜 네트워크’에서도 이런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역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데는 실패했고(별 관심이 없고), 스티브 잡스란 인물의 성격을 관객이 느끼게 하는 데는 성공했다. 스티브 워즈니악 애플 공동 창업자가 남긴 평가는 이 작품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워즈니악은 영화 속 잡스가 자신이 좋아했던 잡스의 훌륭함과 결점을 모두 보여줬다고 말했다. 그는 “이 영화는 현실을 다루는 게 아니라, (잡스의) 성격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음에’는 오지 않는다
극영화로서 ‘스티브 잡스’는 메시지도 남긴다. 그것은 늘 ‘다음’을 기약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다. 아직 자신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여겼던 잡스는 아버지 역할을 거부했다. 조금 더 영향력이 생기면 좋은 아버지가 되고자 했지만, 그 순간은 쉽사리 오지 않았다. 인간의 목표는 달성하고 나면 언제나 조금씩 멀어지기 마련이고, 그렇게 ‘다음’이라는 것은 한 순간도 현재가 되지 않은 채 미래로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다음이 아닌 ‘지금’ 다정해지기로 결단해야 한다. 프로젝트로 숨 돌릴 틈 없이 바쁜 순간에도 아이를 한 번 더 안아주고, 배우자와 눈 맞추고, 부모 손을 잡고 산책하러 나가야 한다. 이 영화에는 잡스가 지금을 선택하는 순간을 극화해서 그려낸다. 성취를 최우선시했던 잡스가 PT 시간을 지키길 포기하면서까지 딸의 이야기에 경청하는 모습이다. 실제로는 없었던 이야기이기에 더 마법적으로 느껴진다. 우리는 그 마법을 지금도 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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