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외양간·창고가 미술관…“지금 할머니들은 그림에 미쳐 있는 단계”
“12명의 선흘 할머니는 아침에 눈을 뜨면 농사를 짓듯 그림을 그린다. 할머니의 집이 미술관이 되면서 선흘마을 전체가 ‘미술관 마을’이 돼가고 있다. 올해 초 이장님은 마을만들기 사업을 추진하면서 선흘마을을 ‘미술관 마을’로 선언했다.”
[주간경향] 제주 선흘마을에 9개의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열리는 <할머니의 예술창고 2023 ‘나 사는 집’> 전시다. 12명의 할머니가 참여하는 이번 전시에서는 할머니들의 집, 소를 키웠던 외양간, 농기구 창고도 미술관으로 변신했다. 12월 9일부터 17일까지 선흘체육관을 중심으로 마을길을 따라 소막미술관, 동백미술관, 분농미술관, 그림창고, 올레미술관에서 할머니들의 작품 200여점을 만나 볼 수 있다.
선흘마을의 할머니들은 3년 전, 최소연 예술감독을 만나면서 생애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최 감독은 2021년부터 제주에서 드로잉 프로젝트 ‘할머니의 예술창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첫해에는 마을 청소년들이 할머니들의 창고를 그리고, 할머니들은 아이들에게 창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할머니들과 그림과의 접점을 만들었다. 마당에서 아이들이 그림 그리는 것을 구경하던 홍태옥 할머니가 빈 이젤 앞에 서서 “나도 기려(그려) 볼까” 하며 목탄을 집어 든 게 본격적인 그림수업의 시작이었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던 최 감독은 며칠 후 스케치북, 색연필, 물감을 들고 홍태옥 할머니를 찾아갔다. 두 번째는 홍태옥 할머니의 ‘절친’ 강희선 할머니였다. 홍태옥 할머니가 마당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강희선 할머니가 찾아와 관심을 보이자, 최 감독은 그 자리에 빈 이젤과 화판 하나를 더 폈다. 그렇게 2명의 할머니로 시작된 ‘할머니의 예술창고’는 2022년 8명 할머니의 전시로 이어졌고, 2023년에는 12명 할머니의 전시 참여로 이어졌다. 지난 12월 13일 최소연 예술감독을 전화로 만났다.
-2022년 전시명이 <할망 해방일지>였고, 올해는 <나 사는 집>이다. 의미는.
“전시명은 할머니들과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결정됐다. 한 할머니가 그림을 그리다 혼잣말로 ‘나 마음에 있는 것이 그림으로 나오니 그게 해방이다’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듣고 ‘심쿵’해서 ‘삼춘, 해방이라? 우리가 아직 해방이 안 됐어?’라고 물으니, ‘이게 해방이주게’라고 하셨다. 다른 할머니들에게 ‘삼춘, 어떤 삼춘은 그림이 해방이라는데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으니, ‘맞주게, 그림이 해방이주게’라고 공감하셨다. 그래서 할머니들과 함께 ‘할망 해방일지’로 첫 전시 제목을 정하게 됐다. ‘나 사는 집’도 마찬가지다. 집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게 했는데, 오가자 할머니가 ‘오가자가 그림 집에 산다, 나 혼자 산다, 나 사는 집이 그림 집이 됐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홍태옥 할머니도 ‘나 사는 집에 옆집 이웃들이 그림 보러 온다’고 하며 ‘나 사는 집’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제주에 정주해 살고 계신 할머니들이 본인의 공간에 대해 확고한 중심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 사는 집’으로 전시명을 정하게 됐다.”
-그림에 대한 할머니들의 열정이 대단한 것 같다.
“처음에는 그림 그리는 걸 쑥스러워하면서 ‘나 죽거든 아이들 보겠구나’ 하고 옷장에 그림을 꽁꽁 넣어두셨다. 그랬던 할머니들이 이제는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와 삶의 터전을 그림으로 그리고 있다. 여자라서, 밭일을 해야 해서, 4·3으로 학교가 불에 타 글을 배우지 못해서 그 어떤 기록도 남길 수 없었던 할머니들의 삶이 흰 종이에 그림으로 그려지고 있다. 지금 할머니들은 ‘그림에 미쳐 있는 단계’다. 작가들이 계속 작품을 구상하듯, ‘겐디 저 낭을(나무를) 종이에 어떵(어떻게) 담을랑게(담지)?’, ‘한의원 가서 침 맞고 완(왔는데) 요자기(요전에) 염소가 아롱아롱(아른아른해서) 소를 하나 기려서(그려서) 연습을 해야 할 텐데 어떵 기려(어떻게 그려)?’라고 고민하신다.”
-‘사람이 틀리니깐 그림이 틀려 마음이 다 틀려난 게 그림도 틀려’, ‘새를 그리다 보니 엄마 보고 싶다. 그림 때문에 울어진다’, ‘세상 그래 살안 이런 것도 해보고 꿈에도 생각 안 했어 그림 그리는 것’ 등 그림과 함께 쓰는 할머니들의 짧은 글들도 인상적이다.
“학교에 다닌 분이 아무도 안 계신다. 다들 한글을 뗀 정도인데,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정말 두 손으로 그들의 말씀을 받아적게 된다. 처음에는 할머니들이 맞춤법 틀릴까봐 글을 안 쓰셨다. 그래서 할머니 말이 너무 아름답다고 방금 하신 말씀 여기에 적어 자제분들이 보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더니 ‘기(그래)?’라고 하며 용기 내서 쓰기 시작하셨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을 소개해 달라.
“올해 전시의 메인 작품은 고순자 할머니의 ‘아침에 일어나면 그림을 하나 그려야 해’다. 선흘마을 ‘그림 할망’들의 선언문 같은 작품이다. 학교에 다녀본 적이 없던 고순자 할머니는 부엌에 그림방을 만들어놓고 독학하듯 그림을 그린다. 아침에 일어나면 온 마음이 그림으로 향한다. 빈센트 반 고흐가 매일 들판으로 향했던 그 마음과 닮았다. 또 개인적으로 올해 인상 깊었던 작품은 박인수 할머니의 ‘황금향이 너무 좋아서 따고 있습니다’다. 박인수 할머니는 오른팔에 인공관절 수술을 해서 왼팔로 그림을 그린다. 황금향을 따는 자신을 그린 그림인데, 너무 인상적이었다. ‘베개’ 시리즈도 있다. 홍태옥 할머니가 불면증이 있는데, 밤에 잠이 안 와 베개를 그렸다. ‘추석에 아들, 손주, 며느리 다 와서 잠 잘 때는 베개가 모자라서 안 벤 사람도 있었는데 지금은 남아돌아 별생각이 다 났다’고 적으셨다. 이를 계기로 수업에서 할머니들께 각자 베개를 가져와 그리게 했는데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떠올리는 베개, 옛날에 많은 식구가 함께 살았던 때를 떠올리는 베개 등을 이야기하셨다. 김인자 할머니는 4·3의 기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시국에 베개가 어디 이서(어디 있어). 아무거라도 배영잤주게(베고 잤지) 옷슬 모랑(옷을 모아) 배영잤주게. 자다 보면 군인들이 와 문을 발로 차부난(차니) 깊은 잠을 못 자주게(못 잤다). 이 동네 사람들 어디 가신고 말해보라. 이불속에 들어가 박박 터렀주게(떨었다)’ 백지 위에 그림을 그린다는 건 아이들 놀이 같은 것일 수도 있지만, 할머니들에게는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굉장히 중요한 매개가 되는 것 같다.”
-마을 분위기도 달라졌을 것 같다.
“이제 ‘선흘’ 하면 할망들의 그림을 빼놓을 수 없게 됐다. 선흘에 그림 바람이 불고 있다. 올해 초에 이장님이 ‘미술관 마을’로 선언했다. 마을만들기 사업에도 지원해보자는 이장님의 제안으로 지난 3년간 할머니들과 함께했던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계획서를 만들어 보냈고, 지원사업으로 선정돼 지원금을 받게 됐다. ‘뮤지엄 선흘’을 모토로 추진위원단이 꾸려졌고 마을부녀회, 청년회, 영농회 분들이 모두 추진단에 들어와 계신다. 선흘마을이 주민이 1000명이 안 되는 작은 마을이라 원탁회의가 있다. 마을 분들의 의견을 받으며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는 중이다. 전시회를 앞두고 마을에서는 ‘할머니에게 붓을! 할머니에게 물감을!’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전시회를 축하하기 위해 꽃다발과 떡을 선물하곤 하는데, 이제는 할머니에게 물감과 붓을 선물하자는 취지다. 할머니들 작품 판매도 열심히 한다. 할머니들의 모든 작품을 한 점씩 사겠다는 분도 있고, 그림에 그려진 삽을 보고 그 삽을 사가겠다는 분도 있다. 그림을 소장한 이웃집도 미술관이 되고 할머니의 집도 미술관이 되면서 선흘마을 전체가 ‘미술관 마을’이 돼가고 있다. 특별히 올해는 마을 청년이 참여하는 ‘화방’을 열고 할망들의 작품, 기념품과 그림 재료를 판매하는 중이다.”
-서울에서 예술의 문턱을 낮추는 ‘테이크아웃 드로잉’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젠트리피케이션에 맞서 ‘재난학교’ 대표 등을 맡기도 했다. 제주에서의 삶은 어떤가.
“육지에서의 삶이 계획을 짜고 설계를 하는 삶이었다면, 제주에서의 삶은 오늘 하루의 농사를 짓는 삶과 같다. 12명의 선흘 할머니들은 아침에 눈을 뜨면 농사를 짓듯이 그림을 그린다. 제주로 이주하면서 할머니들의 삶, 그 문화적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상속자로 살아가고 있다. 육지에서는 재난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는 캄캄한 마음으로 살았는데, 여기서는 농부처럼, 아침에 눈을 뜨면 그림 하나 그려야 된다는 할머니들처럼 나도 살고 있다. 제주에 내려오지 않았다면 각박하게 서둘며 조급하게 살았을 것이다. 여기 내려와 이렇게 느슨하지만, 노동하는 삶이 있다는 것을 배우게 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가끔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고민을 하다 할머니 집에 가면 할머니가 베개를 쓱 건네준다. 그 베개를 베고 잠깐 누우면 그저 평안이라는 단어만이 남는다. 이번 전시회에서도 할머니들의 베개를 사람들 키 높이로 설치했다. 사람들이 잠깐이라도 마음의 쉼, 평안을 얻어갈 수 있었으면 해서다.”
-‘각자 발 딛고 있는 곳에서 우리는 어떤 인류가 될까’라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어떤 의미인가.
“지금 세상이 흘러가는 방식이 좀 어렵지 않나. 전쟁 중인 곳도 있고, 어려운 일을 당하는 사람도 많다. 지구 시민으로 땅에 발 딛고 살면서 각자 마음이 쓰이는 부분이 다 있을 것이다. 개인, 1명의 인류이다 보니 내가 세상의 모든 어려움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됐다. 그래서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는 한 번도 학교에 다녀본 적 없는 할머니들에게 마지막으로 ‘그림공부’를 할 수 있는 배움의 기회를 제공해드리는 일이다. 그게 내가 선 곳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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