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지배해온 '1强 파벌' 휘청… "파문 어디까지" 위기의 기시다 [세계는 지금]

강구열 2023. 12. 16.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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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민당 아베파 비자금 조성 일파만파
정치자금 파티서 초과 모금액 의원 ‘손’에
5년간 수억엔 비자금 조직적 조성 의혹
장관·당간부 등 정계 실세 다수 연루 거론
2000년대 4명 총리 배출한 ‘1强’ 아베파
“파벌의 붕괴”… 내부서도 엄청난 위기감
‘아베파 중용’ 기시다, 국정운영 변화 예고
내각서 아베파 각료들 배제 움직임 뚜렷
日 언론 “내부 반발 땐 구심력 약해질 수도”
日 과거 정치자금 사건들
록히드서 5억엔 뇌물 다나카 前 총리 체포
내각 총사퇴 이어진 ‘리쿠르트 사건’도 충격
집권여당 자민당의 최대파벌 아베파(정식명칭 ‘세이와정책연구회’)의 비자금 조성 의혹이 일본 정치권을 뒤흔들고 있다. 하나의 파벌에 머물지 않고 ‘일본을 지배해 왔다’는 평가를 들을 만큼 막강한 위세를 가진 정치집단의 위기는 자민당의 위기이기도 한지라 파문이 어디까지 확산될지 가늠하기 힘든 상황이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얼마 전까지 회장으로 있었던 기시다파(고치카이)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불거지는 등 기시다 정권의 국정운영에도 상당한 변화가 불가피하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 11월 2일 도쿄 총리관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답변하는 모습. 지지율 하락이 이어지는 가운데 자민당 최대파벌 아베파의 비자금 조성 의혹이 불거지면서 기시다 총리의 정치적 부담이 더욱 커졌다. 도쿄=로이터연합뉴스
◆“조직적 비자금 조성 의혹”…정계실력자 연루

파문은 자민당 주요 파벌이 정치자금 모금행사(파티)에서 모은 돈을 수지(收支)보고서에 제대로 기재하지 않고 있다는 고발에서 시작됐다. 일본 정치자금법은 정치자금 파티에서 20만엔(약 180만원)이 넘는 ‘파티권’을 산 개인, 단체는 이름과 금액 등을 수지보고서에 밝히도록 하고 있다. 소속 의원이 할당된 파티권을 판매해 진행하는 정치자금 파티는 지난해 각 파벌 연간 수입의 50∼80%를 차지할 정도로 파벌 운영에서 중요하다.

아베파가 문제가 되고 있는 건 소속 의원별 파티권 할당량을 넘은 초과분은 수지보고서에 기재하지 않고 의원들에게 돌려줬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지난 5년간 5억엔(약 45억원) 정도의 비자금을 조직적으로 조성했다는 게 이번 파문의 핵심이다.
아베파 소속 99명 의원 대부분이 적든 많든 이런 관행에 연루되어 있다는 보도까지 나오는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는 건 지난 14일 사실상 경질된 마쓰노 히로카즈 전 관방장관, 니시무라 야스토시 전 경제산업상, 같은 날 사표를 제출한 다카기 쓰요시 당국회대책위원장, 세코 히로시게 참의원(상원) 간사장, 하기우다 고이치 정조회장과 아베파 좌장인 시오노야 류 전 문부과학상이다. 모두 내각, 자민당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정계 실력자들이다. 마쓰노 전 관방장관(2019∼2021년), 니시무라 전 경산상(2021∼2022년), 다카기 위원장(2022년 이후)은 아베파 운영을 책임지는 전·현 사무총장이다.

기시다파도 파티 수입 일부를 수지보고서에 기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아사히는 “미기재액이 2018∼2020년 3년간 2000만엔(1억8000만원)으로 추산된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기시다파는 파티권 구입자가 파벌에 송금하는 정치자금을 취합하는 과정에서 소속의원 중 누가 판매한 파티권인지 분명하지 않을 경우 미기재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초과분을 의원들에게 지급하는 과정에서는 자금 흐름을 계파와 의원 측 수지보고서에는 기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도쿄지검 특수부는 우선 아베파에 대한 강제수사 방침을 굳히고 돈을 돌려받은 의원 본인에 대한 조사를 준비하며 본격적인 수사에 나서고 있다. 수지보고서 미기재의 고의성, 미기재 금액의 규모와 기간, 사적 유용 여부, 해당 의원의 미기재 사전 인지 및 개입 여부 등에 초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저무는 1강 시대…“아베파의 붕괴”

“파벌의 붕괴다.”

아사히가 전한 아베파 한 중진의 고백이다. 이번 사건이 미칠 파장에 대한 아베파 내부의 위기감이 얼마나 큰지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2000년대 일본 정치는 ‘아베파 1강(强)의 시대’로 불린다. 모리 요시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후쿠다 야스오 4명의 총리를 배출했다. 이들의 재임기간만 16년에 이른다. 스가 요시히데 정권, 기시다 정권에서도 최대파벌의 위력은 꺾이지 않았고, 아베 전 총리가 지난해 7월 사망한 이후에도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하지만 비자금 조성 의혹이 터지면서 아베파의 영향력 축소는 불가피한 상황이다. 무엇보다 내각, 자민당 주요 당직에서 아베파 배제 움직임이 뚜렷하다. 기시다 총리는 지난 14일 아베파 출신 각료 4명(마쓰노 전 관방장관, 니시무라 전 경산상, 스즈키 준지 전 총무상, 미야시타 이치로 전 농림수산상)과 차관인 부대신 5명을 모두 교체했다. 차관급인 정무관 6명도 바꾸려 했으나 아베파의 강한 반발 등을 고려해 1명만 교체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기우다 정조회장 등도 사표를 제출해 자민당 내에서의 입지도 흔들리고 있다. 기시다 총리는 자민당 당직자 후속 인사에 대해 “국정 추진에 지장이 없도록 올해 안 적절한 시점에 인사를 하겠다”고 밝혔다. 요미우리신문은 “아베파 의원은 후임 인선에서도 배제될 것이 확실하다”고 분석했다. 실제 교체된 각료 네 자리는 기시다파, 아소파, 모리야마파 소속 의원과 무파벌 의원으로 채워졌다.
지난 2022년 9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국장이 끝난 뒤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 아베 전 총리의 부인인 아키에 여사가 묘역을 뒤로하고 떠나자 의장대 대원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아베파는 부글부글 끓고 있다. “누구 덕분에 총리가 되었는가”, “너무 급하다” 는 등 기시다 총리를 겨냥한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아베파라는 이유만으로 돌을 맞은 상황”이라며 답답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론이 워낙 악화된 데다 아베 전 총리 사망 이후 확실한 구심점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어 제대로 대응하기 힘들 것이란 분석이 강하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아베파가) 20년가량 계속된 전성기로부터 일거에 존속이 위험해진 상황이 됐다”고 진단했다. 요미우리는 “다른 파벌이 정치자금 처리를 엄격히 해온 반면 (아베파는) 옛날 수법을 계속하며 조직을 쇄신할 기회가 없었던 것 같다”는 전문가의 비판을 전했다.

◆기시다 총리 국정운영 변화 예상

기시다 총리의 국정운영에도 상당한 타격이 불가피하다. 자민당 내 4위 파벌 기시다파의 수장으로 권력 기반이 강하다고 할 수 없는 기시다 총리가 그간 아베파의 협조를 받아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아베 전 총리 생전에는 그의 조언에 기대 정책을 추진하고 인사를 단행했다. 올해 9월 개각에서는 내년 가을 자민당 총재 선거를 의식해 아베파 인사 중용을 이어갔다. 아사히는 “아베파를 중시하는 기조 위에서 파벌 간 균형을 모색해 왔던 기시다 정권의 구조가 큰 변화를 맞게 됐다”며 “(아베파 각료, 당 간부를 경질하면) 아베파가 반발할 가능성도 있어 기시다 총리의 구심력이 떨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고(故) 아베 신조 전 총리. AP연합뉴스
◆총리의 범죄 '록히드 사건' 역대 최대 스캔들

일본은 과거에도 수차례 대형 정치자금 스캔들이 터지며 큰 홍역을 치렀다. ‘총리의 범죄’로 불리는 1970년대 ‘록히드 사건’은 지금도 사상 최대의 스캔들로 꼽힌다. 시작은 1976년 2월 미국의 상원 공청회였다. 미국 항공기 제조사 록히드가 신형 여객기를 판매하기 위해 세계 각국의 정부 관계자에게 거액의 뇌물을 건넸다는 증언이 나왔고 이 중에 일본도 포함되어 있었다.

도쿄지검 특수부의 수사가 시작돼 같은 해 7월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가 체포됐다. 다나카 전 총리는 전일본항공(ANA)에 록히드사의 여객기를 사게 하고 5억엔(약 45억원)을 받았다는 혐의로 기소됐다. 다나카 전 총리가 당시 정계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과시했다는 점 때문에 이 사건은 일본이 정치자금 문제를 강하게 의식하는 계기가 됐다.
일본 도쿄지방검찰청 입구 모습. AP연합뉴스
1980년대에는 ‘리쿠르트 사건’으로 파란이 일었다. 취업정보회사인 리쿠르트사가 계열사 리쿠르트 코스모스의 미공개 주식을 공개 직전에 정·관·경제계의 유력 인사들에게 싸게 양도하여 공개 후 부당이익을 보게 한 사실상의 뇌물공여 사건이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다케시타 노보루 등 거물 정치인들이 연루된 것이 알려지면서 1989년 내각 총사퇴로 이어졌다. 1993년에는 자민당 부총재를 지낸 가네마루 신이 탈세 혐의로 체포되는 일이 있었고, 1993∼1994년에는 건설회사 제네콘이 중앙 및 지방 정치권에 뇌물을 건넨 ‘제네콘 오직(汚職) 사건’이 발생했다.

최근의 것으로는 아베 신조 전 총리가 당사자인 ‘벚꽃을 보는 모임’ 관련 사건이 종종 회자된다. 아베 전 총리 측은 2013~2019년 매년 본행사 전날 지역구에서 수백 명을 고급 호텔로 초청해 만찬을 했는데, 참석자로부터 적은 회비만 받고 차액을 보전해 줬다는 의혹 등이 2019년부터 제기됐다. 아베 전 총리는 만찬 비용은 참가자가 지불했고, “사무소나 후원회의 지출은 일절 없었다”고 해명했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 수사에 따라 회계 처리를 담당한 전 비서만 약식기소됐지만 아베 전 총리는 증거 불충분 등의 이유로 불기소 처분됐다.

도쿄=강구열 특파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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