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리가 다시 광고 찍자 '이 사람'이 사라졌다 [수·소·문]
'자기반성 성장 서사' vs '유난스럽다'
웃음·쓴소리 공존하는 '놀이터' 된 이유
편집자주
‘수ㆍ소ㆍ문’은 ‘수상하고 소소한 문화 뒷얘기’의 줄임말로 우리가 외면하거나 놓치고 지나칠 수 있는 문화계 이야기들을 다룹니다.
"그거 아세요? 우리... 운명인 거?" 가수 이효리는 이달 12일 일정을 소화하다 대기실에서 이런 문구가 적힌 입간판을 받았습니다. 그의 남편이자 밴드 롤러코스터 출신 기타 연주자인 이상순이 결혼기념일에 벌인 이벤트가 아닙니다. 입간판을 제작한 곳은 식품 기업 풀무원입니다. 이날 이효리와 광고 계약을 맺은 뒤 깜짝 선물(?)을 보낸 겁니다.
'횰'과 풀무원의 평행이론
풀무원이 '이효리와 운명'이라고 주장한 사연은 이렇습니다. 이효리가 활동했던 그룹 핑클의 데뷔일(5월 12일)과 풀무원의 창립기념일이 같고, 이효리의 애칭과 이효율 풀무원 총괄 최고경영자(CEO)의 이름 줄임말도 '횰'로 같아 곳곳에 연결고리가 숨어 있었다는 겁니다. 풀무원은 1984년 창사 이래 이번에 처음으로 연예인을 광고 모델로 발탁했습니다. 제주에서 친환경적인 삶을 추구하는 이효리의 이미지가 지속가능한 미래를 중시하는 회사의 비전과 맞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풀무원은 그간 바른 먹거리 기업으로의 이미지를 지키려고 광고 모델로 연예인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 고집을 꺾은 계기를 이효리와 풀무원의 평행이론으로 운명적 만남을 부각해 웃음을 준 겁니다.
풀무원의 말처럼 이효리와의 운명적 만남은 이효리가 상업 광고 출연을 11년 만에 재개하면서 성사됐습니다. 이효리는 동물과 환경 보호에 앞장서고 채식을 하면서 그런 삶의 가치관가 맞지 않는 상업 광고를 찍지 않겠다고 2012년 선언했습니다. 2013년 결혼한 이효리는 JTBC 예능프로그램 '효리네 민박' 시리즈(2017~2018)로 다시 주목받을 때도 상업 광고 출연 제안을 여럿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상업 광고와의 인연을 뚝 끊었던 이효리는 올해 7월 13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다시 광고하고 싶습니다. 문의는 안테나뮤직(소속사)으로~"란 글을 올리며 상업 광고 촬영 재개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그의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광고업계는 재빠르게 움직였습니다. 안테나뮤직엔 순식간에 100여 건의 광고 출연 요청이 몰렸습니다. 말 그대로 '쇄도'한 겁니다. 이효리가 올린 광고 출연 재개 선언 게시물엔 '지금 송금하면 될까요'(카카오페이), '이효리는 거꾸로 해도 이효리니까 아시아나 광고 모델 계약 즉시 사명에서 '나'를 빼겠습니다'(아시아나), '지프라기도 잡고 싶어요'(지프) 등의 광고 제안 글이 굴비 엮이듯 줄줄이 올라왔습니다. 이렇게 A4용지 3~4장을 빼곡하게 채운 제안들 중에서 골라 이효리는 온라인 쇼핑몰 롯데온을 시작으로 10월부터 광고 촬영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광고 제안 100여 건... 기업들 '눈치싸움'
'유고걸'이나 '미스코리아'처럼 최근 5년 새 대중의 큰 사랑을 받은 곡도 딱히 없는데 왜 아직도 이효리일까요.
이효리는 K콘텐츠 시장에서 독특하게 입지를 쌓았습니다. '10분이면 여자 친구가 있는 남자의 마음도 빼앗을 수 있다'('텐미닛'·2002)며 관능적인 무대로 수많은 남성을 유혹한 '섹시 심벌'이었던 그는 무대 밖에선 생명이라는 화두를 던지며 다른 길을 갔습니다. 오른팔에 '봄에는 사뿐히 걸어라, 어머니 같은 지구가 임신 중이니까'라는 뜻의 영문 'Walk lightly in the spring, Mother earth is pregnant'란 문신을 새긴 그는 제주 집 텃밭에서 콩을 길러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팜파탈'과 '생태주의', 두 극단의 오묘한 결합으로 이효리는 다양한 세대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영향력을 키웠습니다.
"이효리는 핑클에서 홀로서기 한 뒤 저만의 서사를 만들어 결혼 후에도 누구의 아내이자 엄마가 아닌 주체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보기 드문 아이돌 출신 여성 연예인"(지혜원 경희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이기도 합니다. '쟁반 노래방'과 '패밀리가 떴다' 등 인기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쌓은 친숙함과 희소성이 어느덧 40대 중반에 접어든 이효리에게 아직도 광고 출연 제의가 끊이지 않는 이유입니다. 다시 광고를 찍기 시작한 이효리의 모델 단가는 7억 원 선이라고 합니다. 시장에서 웬만한 10, 20대 아이돌보다 높게 책정됐습니다. "이효리 광고 효과를 먼저 보기 위해 광고 공개 순서를 두고 기업들이 눈치싸움을 벌이면서 난감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소속사 안테나가 '잠수' 탄 사연
이효리의 상업 광고 재개에는 우여곡절도 따랐습니다. 연예·광고 업계 관계자들 얘기를 들어 보니 이효리 관련 실무를 총괄하는 안테나의 한 직원은 이효리가 SNS에 상업 광고 재개 관련 글을 올린 날 갑자기 '잠수'를 탔다고 합니다. 전화기도 이틀 동안 꺼져 있었습니다. 이효리가 광고를 진짜 찍고 싶은지조차 확인이 안 된 상황에서 외부 문의가 빗발쳐 섣불리 응대할 수 없는 탓에 외부와의 연락을 뚝 끊은 겁니다. 마침 안테나 여러 직원들이 휴가를 낸 때이기도 했습니다.
안테나 관계자 등에 따르면 그날 이효리는 즉흥적으로 광고 출연 재개 글을 올렸습니다. 이상순에게도 얘기를 미리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안테나는 정재형, 박새별, 남성 듀오 밴드 페퍼톤스, 루시드폴, 정승환, 샘 김, 권진아 등을 매니지먼트하는 회사입니다. 방송인 유재석이 2년 전 이곳에 둥지를 틀었지만 소속 연예인의 광고 건으로 이렇게 연락이 쏟아진 적은 처음이라 신속한 대처가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안테나에 1년 동안 올 전화가 이효리가 SNS에 광고 관련 글을 올린 날 모두 쏟아졌다"는 말이 내부에서 나올 정도니 말입니다. '밖'엔 알려지지 않은 이효리의 광고 출연 재개를 둘러싼 해프닝들입니다.
세상 제일 쓸데없는 게 '연예인 돈 버는 얘기'라는데
이효리 광고 재개 소식과 그 후 상황을 둘러싼 누리꾼들의 관심은 석 달 넘게 식지 않고 있습니다. 세상 제일 쓸데없는 게 '연예인 돈 버는 얘기'라고들 합니다. 이효리의 광고 출연 재개는 부동산을 통해 자산을 불린 소식도 아니라 재테크 정보조차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이효리의 광고 촬영 재개에 이렇게까지 관심을 보이는 걸까요. 이효리가 '내 생각이 짧았다'고 반성하고 마음을 바꿔 먹는 모습과 그 계기에 공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효리가 밝힌 다시 광고를 찍기로 마음을 돌려 먹은 계기는 이랬습니다.
"(신곡을 만들 때) 댄스팀으로 홀리뱅('스트릿 우먼 파이터' 시즌1 우승팀)도 쓰고 싶고 비싼 작곡가도 부르고 싶고 뮤직비디오 만들 때도 옛날처럼 몇 억씩 쓰고 싶은데 (소속사에) 요구하기가 미안하더라고요. 나도 보여 주고 싶고 팬들도 원하는데 왜 '이걸(상업 광고를) 안 찍는다'고 했을까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많이 벌고 쓰고 기부도 많이 하면 됐는데···."(유튜브 '짠한형'에서)
정리하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가 광고로 돈 벌어 하겠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려면 때론 손에 '흙'도 묻혀야 하는 게 인생이라고들 합니다. 소속사나 스태프들이 다 차려 준 밥상만 먹는 게 아니라 이효리는 SNS로 광고 영업을 몸소 뛰었습니다. 이효리가 광고 찍는 여정을 적지 않은 이들이 지켜보는 배경이 아닐까요.
물론 '광고 찍으며 돈 버는 데 유난'이라며 이효리의 행보를 불편하게 보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효리가 광고를 다시 찍겠다는 발표도, 옛 고집에 대한 반성도 없이 광고부터 촬영했으면 어땠을까요. 역풍이 만만치 않았을 겁니다. "돈을 벌고 싶다는 속내를 드러내고, SNS와 유튜브 등을 통해 그간 견지해오던 생각에 대한 반성과 앞으로 다른 길을 가보겠다는 선언을 친근하게 하면서 반감을 덜 샀다"(김헌식 카이스트 미래세대행복위원회 위원)는 의견도 있습니다. 광고를 다시 찍으며 돈을 버는 행위에 대한 '포장'을 이효리가 재치 있게 해 큰 역풍을 피했다는 겁니다.
이효리의 또 다른 성장일까요, 아니면 어쨌거나 유난일까요? 독자 여러분은 이효리의 광고 촬영 재개를 둘러싼 시끌벅적한 풍경을 어떻게 보고 계신가요?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121214380004141)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102715220005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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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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