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년 전 떠난 친모가 아들 목숨값 챙기는 게 말이 되나요"
남동생 실종에 생모 54년 만에 나타나 보상금 수령
"자식 돌보지 않은 부모는 상속 제외시켜야" 분통
54년 만이었다. 기억조차 나지 않던 엄마의 얼굴을 마주했다. 두 살, 다섯 살, 여덟 살 삼남매를 버리고 떠난 뒤 반백 년이 넘도록 연락 한번 없었던 엄마는 2021년 1월 선원으로 일하던 김종안(56·실종 당시)씨의 실종 소식에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54년 동안 한 번도 자식들을 들여다보지 않던 사람이, 막내아들의 목숨값을 챙기기 위해 '엄마'의 자격으로 나타난 것이다.
"위로하러 왔다"고 했지만 속내는 달랐다. 구순을 바라보는 노모는 60대가 된 딸에게 흔한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다. 김종선(61)씨가 엄마에게 들은 첫마디는 이랬다. "내가 두 살까지 키웠기 때문에 나한테 권리가 있다." 노모는 혼자가 아니었다. 새로 꾸린 가정에서 낳은 아들, 딸, 사위까지 합세해 들이닥쳤다. 생전 처음 보는 그 집 사위도 같은 말을 반복했다. "처음에는 무슨 권리를 말하는 건지도 몰랐죠. 나중에 보니까, 돈 얘기더라고요." 종선씨는 그날만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리고, 자다가도 숨이 넘어간다고 했다.
노모는 실종된 아들의 생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종선씨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수색 과정에 열을 올리며 애를 태우는 동안, 노모의 가족은 선박회사가 보상금을 지급하지 않는다고 성화였다. 노모는 사고가 발생한 지 1년이 지나자 곧바로 아들의 실종선고를 했고, 사망 보험금과 보상금까지 3억 원을 챙겼다. 종안씨 앞으로 있는 집과 통장도 자신의 명의로 바꿔놨다.
자식을 버리고 떠난 엄마가 아들 목숨값을 챙길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법정 상속 자격 1순위이기 때문이다. 민법 제1004조에 따르면 △살인·살인 미수 △상해 치사 △유언 방해 △유언 강요 △유언서 위조·변조·파기·은닉 등 극히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직계존속 등 법정 상속인의 상속이 가능하다. 종안씨의 경우 배우자와 자녀가 없어 직계존속인 생모가 상속 우선자가 된 것이다. 종안씨에게는 6년간 함께 살아온 사실혼 관계의 배우자가 있었지만,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상속 대상에서 배제됐다.
종선씨는 법의 부당함에 가슴을 쳤다. "54년 동안 엄마 대신 고모와 할머니가 우리 삼남매를 키웠습니다. 보상금을 받아도 그분들이 받아야지, 양말 한 켤레, 사탕 하나 안 보내놓고 이제 와서 생모라고 자식 목숨값을 챙기는 게 법이고 정의입니까."
법을 고치려는 시도는 있었다. 부양 의무를 다하지 않은 부모가 세상을 떠난 자식의 재산을 상속받는 것을 제한하는 일명 '구하라법'(민법 일부 개정안, 서영교 더불어민주당 의원 대표발의)이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이다. 2019년 11월 가수 구하라씨가 세상을 등지자, 20년 동안 연락 없이 지냈던 친모가 뒤늦게 나타나 상속 재산을 요구한 것에 대해 국민적 공분이 일면서 마련됐다. 국회 입법 청원 동의자가 10만 명이 넘어서며 관련 법안이 제출됐지만, 20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데 이어 21대 국회에서도 아직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
민법 개정안은 기존 상속결격 사유에 '양육 의무를 중대하게 위반한 자'를 추가하는 게 핵심이다. 자식을 제대로 부양하지 않은 부모를 상속인에서 제외하자는 것으로, 부양 의무를 어디까지 인정할지를 정하는 일만 남았다. 법무부는 상속 자격 박탈 여부를 법정에서 따지자고 했고, 서영교 의원도 부양 의무를 게을리한 사유가 있으면 가정법원이 상속 결격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을 신설해 절충안을 찾았지만, 올해 안에 법안이 통과될지는 미지수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관계자는 "부양 의무 기한을 적시하자는 의견이 제시돼 논의 중인 것으로 안다. 여야 이견이 남아 있어 조율 중"이라고 말했다. 종선씨 가족에게 해당되는 '선원 구하라법'도 마찬가지로 현재 국회 법사위에 계류 중이다.
지난 3년간 국회와 법원 등을 쫓아다니느라 생계까지 막막해진 종선씨는 답답함을 토로했다. "국민들도 문제 있다고 생각하는 법을 왜 3년째 바꾸지 못하는 겁니까. 짐승이 아니고 사람이라면, 부모라면, 엄마라면, 양심이 있어야지요." 종선씨는 '선원 구하라법'과 '구하라법'이 통과될 때까지 국회 앞에서 노숙 투쟁도 불사하겠다고 했다.
"그날 종안이는 마지막 배였어요. 몸이 힘들어서 더는 못 하겠다고. 마지막으로 한 번만 타고, 키워준 고모가 있는 남해로 내려가 와이프랑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사는 게 마지막 꿈이었는데… 그 추운 바다에서 얼마나 애타게 누나를 불렀을지 생각하면 지금도 억장이 무너집니다. 그래서 저는 끝까지 할 겁니다. 죽어도 법을 꼭 바꾸고 죽을 겁니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부산= 박지영 기자 jypark@hankookilbo.com
이오늘 인턴 기자 oneul0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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