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사기잖아"…엄마 내쫓고 딱 하나 남긴 물건의 정체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페테르 파울 루벤스
'화가 외교관'으로 뛴 그와
프랑스 왕가의 이야기
“이거, 완전히 사기잖아.”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왕은 코웃음을 쳤습니다. 그림 속 주인공은 왕의 아버지와 어머니. 아기 천사들이 가져다준 어머니의 초상화를 보고 첫눈에 반한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건 전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돈 때문에 어머니와 결혼했을 뿐, 어머니를 사랑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거든요. 그리고 어머니 역시 걸핏하면 바람을 피우는 아버지를 혐오했습니다.
그런 사이에서 나온 아들이어서였는지, 왕과 어머니의 사이도 마찬가지로 최악이었습니다. 둘은 권력을 놓고 치열하게 다퉜습니다. 온갖 음모와 흉계를 꾸며 서로를 몰락시키려고 했고요. 각자 군대까지 동원해 싸운 적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왕은 어머니의 모든 것을 빼앗고 외국으로 추방할 수밖에 없었으니, 사람들은 둘 사이를 두고 ‘남보다 못한 원수지간’이라고 수군댔습니다.
지금 왕이 보고 있는 그림들은 그런 어머니의 삶을 터무니없이 미화한 그림들. 어머니가 잘나가는 외국 화가를 불러 거액을 주고 그리게 한 작품들이었습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이 어린 시절의 어머니에게 ‘맞춤형 과외’를 해줬다는 그림부터, 신과 천사와 요정들이 도와준 결혼, 그 후 쌓은 영웅적인 업적들…. 어이가 없을 정도로 사실을 왜곡한 그림들 중에서도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둘 사이를 자애로운 어머니와 효심 깊은 아들처럼 묘사한 부분이었습니다. 또다시 왕은 혼잣말을 내뱉었습니다. “어머니도 참 양심이 없단 말이지.”
“이 그림들을 다 없애버릴까요?” 혼잣말을 들은 신하가 왕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뜻밖이었습니다. “아니, 그냥 놔둬. 없애기엔 아까워. 너무 잘 그렸잖아. 이건 우리 프랑스에 길이 남을 유산이다.” 그리고 왕의 말은 적중했습니다. 이 작품은 400년이 흐른 오늘날까지 루브르 박물관에서 매년 1000만명 가까운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으니까요.
작품들의 제목은 ‘마리 드 메디시스의 생애’, 작가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1577~1640). 오늘은 이 그림들을 열쇠로 삼아 당시 프랑스 왕가의 복잡한 속사정과 함께 루벤스의 삶, 루벤스가 이런 작품을 그리게 된 이유를 풀어나가 보겠습니다.
외교관이 된 천재 화가
루벤스는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바로크 미술의 거장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그림을 정말 잘 그렸습니다. 화려한 색채와 매력적인 곡선으로 표현한 질감, 넘쳐나는 에너지와 유쾌함. 오늘날에도 ‘루벤스의 작품은 그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작품들의 완결판이자 종합판’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림처럼 그의 삶도 비범했습니다. 어린 시절 루벤스의 집안 형편은 넉넉지 않았습니다. 열세 살이 되던 해 루벤스가 귀족의 시동(잔심부름꾼)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 건 이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화가의 꿈을 품은 루벤스는 시간을 쪼개 가며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했고, 2년 뒤 다른 화가의 작업실에 들어가 일을 도우며 본격적인 미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루벤스의 재능은 정말로 빼어나서, 20대 초반이 됐을 때 이미 대가의 반열에 이를 만한 실력을 갖췄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루벤스의 그림은 탁월하다. 하지만 그의 모든 재능 중 그림 그리는 재능은 가장 하찮은 편이다.” 그만큼 루벤스는 모든 능력이 탁월한, 초인에 가까운 인물이었습니다. 일단 얼굴은 잘생겼고 인격도 훌륭한 데다 유머 감각이 풍부했습니다. 교양도 뛰어나서 문학과 역사에 능통했습니다. 라틴어와 프랑스어, 스페인어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정도로 외국어도 잘했습니다. 시동 생활을 한 덕분에 귀족들의 예절을 잘 알고 있었고요. 여기에 사교성이 뛰어나고 사업 수완까지 좋아서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습니다.
각국 왕족과 귀족들이 루벤스에게 ‘화가 외교관’이라는 특별한 역할을 맡긴 것도 이런 다양한 재능 덕분이었습니다. 20대 중반이던 1603년 이탈리아 귀족과 스페인 왕실의 선물 교환을 시작으로 루벤스는 국제 정치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주로 그림을 그리거나 갖다주며 다른 나라의 메시지를 전하고, 상대를 설득하고, 답변을 받아 다시 전달하는 일을 했지요. 루벤스가 가진 교양과 ‘마성의 매력’, 권력자와 가까운 곳에서 사적인 대화를 나누기 쉽다는 궁정 화가의 특성 때문에 그는 최고의 외교관이 될 수 있었습니다.
루벤스 입장에서도 외교관으로 활동할 이유는 있었습니다. 당시 유럽에는 종교 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빌미로 서로 편을 갈라 끊임없이 싸워댔습니다. 특히 루벤스의 본거지가 있는 네덜란드 지방은 오랜 전쟁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종교 갈등, 그리고 이곳을 지배하던 스페인과 네덜란드 독립 세력의 대립 때문이었습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곧은 심성의 소유자였던 루벤스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림이 잘 팔리려면 평화가 찾아오고 경제가 부흥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지요.
반대로 네덜란드 지방의 전쟁과 갈등을 부추기는 나라도 있었습니다. 스페인이 전쟁의 늪에 빠져 국력을 낭비하기를 바라는 라이벌 국가, 프랑스였습니다. 루벤스가 30대 중반이었던 1620년대 초반 프랑스 궁정에 들어간 것도, 그곳에서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마리 드 메디시스의 생애’를 그린 건 이런 맥락에서 출발합니다.
어머니와 아들
당시 프랑스 왕은 루이 13세(루이). 마리 드 메디시스(마리)는 왕의 어머니였습니다. 하지만 이 둘의 사이는 일반적인 어머니와 아들 관계와 아주 달랐습니다.
복잡한 관계의 시작은 루이의 아버지인 앙리 4세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는 종교 갈등으로 내전을 벌이던 프랑스를 통합하고 새로운 왕조(부르봉 왕조)를 연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국민의 종교 자유를 보장하고 그 자신은 개종까지 했었지요.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모든 국민들이 일요일마다 닭고기를 먹게 하겠다”고 말한 왕도 앙리 4세입니다. 그는 당시 유럽에서 보기 드문 민생을 챙기는 왕이었지요. 프랑스를 상징하는 동물이 닭이 된 것도 이때. 프랑스 역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흠도 있었으니, 가정을 돌보지 않는 엄청난 바람둥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앙리 4세가 왕비인 마리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보면 이런 점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마리와 결혼하기 전 프랑스는 오랜 내전을 겪은 탓에 엄청난 빚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부자 명문가(메디치 가문) 출신인 마리가 가져온 거액의 지참금은 이런 빚을 한 번에 해결해 줬습니다. 게다가 마리는 앙리 4세의 아이도 6명이나 낳았습니다.
하지만 앙리 4세에게 마리의 역할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앙리 4세는 끊임없이 바람을 피웠고, 애인이 마리를 ‘뚱뚱한 장사치’라고 불러도 말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앙리 4세가 마차를 타고 가다가 뜬금없이 튀어나온 광신도에게 암살당했을 때 사람들이 마리를 의심했던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증거는 나오지 않았지만요.
앙리 4세가 죽자 마리와의 장남인 루이가 왕이 됐습니다. 하지만 루이가 아직 8살이라 너무 어렸던 탓에, 마리가 섭정으로 나라를 대신 다스리게 됐습니다. 하지만 마리에 대한 프랑스 귀족들의 여론은 좋지 않았습니다. 일단 마리는 그다지 유능한 정치가가 아니었습니다. 눈치도 없었고요. 마리가 외국인이라는 점에 더해 아직도 프랑스어를 잘 못 한다는 점, 친정인 이탈리아에서 온 측근을 요직에 앉혔다는 점이 비호감을 키웠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비판을 받았던 점은 마리가 적국으로 여겼던 스페인과 적극적으로 화해를 시도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아들인 루이를 스페인 공주와 결혼시켰거든요.
그렇게 7년이 흘렀습니다. 어느덧 루이도 열다섯 살이 됐습니다. 어릴 때부터 “널 보면 네 지긋지긋한 아버지가 떠오른다”며 한 번도 안아주지 않은 무정한 어머니. 사랑하는 아버지를 암살했다는 의심을 받는 어머니. “넌 아직 어리고 무능하다”며 권력을 놓지 않는 어머니. 모두가 손가락질하면서 욕하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루이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루이는 귀족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쿠데타를 일으켜 어머니를 몰아낸 후 지방의 성으로 추방해 버렸습니다.
루벤스, 그녀를 그렸지만
그 이후 둘 사이는 막장으로 치닫습니다. 마리가 밧줄을 타고 40m 높이의 벽을 타넘어 탈출한 뒤 두 번이나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어머니를 죽일 수는 없으니, 루이는 매번 마리를 깔끔하게 제압한 뒤 풀어줬습니다. “엄마인지, 원수인지…. 계속 밖에 놔두면 음모를 꾸미니 차라리 옆에 두고 감시해야겠다.” 루이 13세가 마리를 다시 궁정으로 불러들인 건, 역설적으로 마리를 전혀 믿을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궁정으로 돌아온 마리는 지치지도 않고 정치적으로 부활할 수단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마리는 ‘내 삶과 업적을 홍보하는 멋진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당시 그림은 정치가의 위엄을 나타내는 중요한 홍보 수단이었거든요. 다만 지금 처한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최고의 화가가 그린 그림이 필요했습니다. 머리에 떠오르는 건 딱 한 사람. “루벤스 아니면 안 돼!”
루벤스 입장에서도 마리의 의뢰는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돈과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건 물론, 평화를 추구하는 마리가 권력을 되찾게 되면 네덜란드 지방에 평화가 찾아올 거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루벤스는 자신의 그림 실력과 교양을 총동원해, 사실 별로 멋지지 않았던 마리의 삶을 24점의 ‘마리 드 메디시스의 생애’ 연작 속에서 한 편의 신화로 재탄생시켰습니다. 완성된 작품을 본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두 명의 이탈리아 화가가 10년 걸려도 못 그릴 그림을 루벤스는 4년 만에 그려냈다”고들 했지요.
하지만 그림은 그림일 뿐. 이런 노력에도 마리는 권력을 되찾지 못했습니다. 그걸로도 모자라 프랑스에서 영원히 추방까지 당했습니다. 루이의 최측근을 쫓아내려는 음모를 꾸미다 발각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마리는 프랑스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전 유럽을 다니며 정치적·외교적 노력을 기울였고, 루벤스도 이를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하지만 누가 봐도 마리가 루이 13세를 몰아내는 건 쉽지 않은 일. 호응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결국 마리는 이 나라 저 나라를 전전하다 독일에 있는 별장에서 쓸쓸히 숨을 거뒀습니다.
루이는 당연히 루벤스가 그린 그림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새빨간 거짓말이었거든요. 하지만 작품들은 그대로 남겨뒀습니다. 너무 잘 그렸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평화를 찾다
그 후에도 루벤스는 유럽과 네덜란드 지방의 평화를 위해 열심히 뛰었습니다. 50대 초반에 접어든 1630년 영국과 스페인이 평화 협정을 맺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건 루벤스의 가장 큰 외교적 성과 중 하나로 꼽힙니다. 영국 왕은 그 공로를 인정해 루벤스에게 기사 작위를 내렸고, 스페인 왕실도 루벤스에게 기사 작위를 줬습니다.
이렇게 평화를 위한 루벤스의 노력은 마침내 열매를 맺었다고 마무리할 수 있으면 참 좋으련만, 현실의 벽은 높았습니다. 평화 협정을 맺는 그 순간에도 영국과 스페인은 서로의 뒤통수를 칠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루벤스는 결국 깨닫게 됩니다. 철저히 이익의 논리로 움직이는 국제 정치 앞에서는 걸작도, 외교관의 노력도 아무 힘이 없다는 사실을요.
전 유럽을 누비는 사이 어느덧 루벤스의 나이도 환갑이 거의 다 됐습니다. 건강 악화와 현실에 대한 실망이 겹치면서 루벤스는 1635년 결국 정치·외교 활동을 모두 그만두고 네덜란드 시골로 돌아갔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에 둘러싸여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는 데만 집중하면서, 말년의 루벤스는 마침내 행복해졌습니다.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빛나는 지성과 생명력으로 행복이 가득 담긴 그림들을 그려냈습니다. 직접 정치와 외교를 통해 평화를 추구했던 젊은 시절과 달리, 말년의 루벤스는 그림을 통해 사랑과 행복이라는 가치 자체를 널리 퍼뜨리려 했던 것 같습니다.
루벤스의 그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접힌 살이나 피부의 주름 같은 몸의 특성이 지나치게 강조돼 있어서 좀 부담스럽다는 이유에서입니다. 하지만 피부의 색과 결의 아름다움, 인간 육체의 투명한 깊이감, 피부밑에서 약동하며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은 에너지와 생명력을 루벤스만큼 잘 묘사한 화가는 없었습니다. 덕분에 루벤스가 그린 작품들은 오늘날까지도 보는 이에게 이렇게 힘차게 외치는 듯합니다. “삶이란 기쁘고 아름다운 거야. 사랑은 이렇게 멋져. 쓸데없이 싸우지 말고 사랑을 하란 말이야.”
*이번 기사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질 네레 지음, 문경자 옮김, 마로니에북스-Taschen 펴냄), 'Peter Paul Rubens et la France, 1600–1640' (Alexis Merle du Bourg 지음)을 중심으로 '명화로 읽는 부르봉 역사'(나가노 교코 지음, 이유라 옮김, 한경arte 펴냄)와 학술 논문 'The Art Patronage of Maria de’ Medici"(Deborah Marrow)을 참조했습니다.
**루벤스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내용을 더 알고 싶으신 독자께서는 같은 시리즈 기사인 <"불륜한 제 남편 용서해주세요" 아내가 호소한 까닭은>(1월 28일, 루벤스 출생의 비밀) <"호랑이 새끼를 키웠다" 스승 아내 넘본 제자의 결말은>(2월 4일, 제자와의 관계 및 인품 등)을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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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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