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꾹꾹 ‘내 생각’ 담아서, 더 오래 남도록

한겨레 2023. 12. 16.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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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손소영의 짧은 글의 힘][한겨레S] 손소영의 짧은 글의 힘 _ 필사
드라마 ‘크리스마스 스톰’의 인상 깊은 대사를 필사한 모습. 손소영 제공

강의를 하다 보면 어떤 글을 어떤 방식으로 필사하면 좋을지 질문하는 분들을 많이 만납니다. 필사하기에 좋은 작가를 콕 집어서 추천해달라는 얘기도 많이 듣습니다. 그래서 정말 많은 분들이 글쓰기 연습의 첫 단계로 필사를 선택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물론 필사는 글쓰기를 익히고 연습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입니다. 일단 그대로 따라 쓰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어떤 형식과 구성에 익숙해지게 되니까요.

“잊어버렸다”와 “기억하지 못한다”

방송작가 지망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어렸을 때부터 백일장을 휩쓸었다는 수상자보다 그야말로 티브이(TV)나 라디오를 ‘끼고 살았다’는 이들이 방송 대본을 더 잘 쓰고 프로그램 구성도 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어떻게 써야 하는지, 어떤 식으로 구성해야 하는지를 체득했기 때문입니다. 저도 대학생 시절 좋아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배철수의 음악캠프’의 ‘오프닝 멘트’를 매일 필사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 덕분에 선배들한테 배우지 않고도 첫 ‘오프닝 멘트’를 비교적 수월하게 써 내려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점에서 제게는 필사가 방송글을 연습하고 배우는 데 좋은 스승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작정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필사를 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자신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글을 선택해서 하는 게 도움이 됩니다. 어느 정도 자신의 스타일이 정착돼 있는 분들에게는 그와 비슷한 글을 필사하도록 권합니다. 자신의 재능이나 자기 글의 특징과는 맞지 않거나 반대되는 글을 따라 쓰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자기 글의 색깔을 파악하지 못한 분들이나 명확히 구축되지 않은 분들은 여러 글을 다양하게 시험해보면서 그 글들의 장점을 흡수하고 나만의 강점을 찾아내는 방향으로 연습하는 게 좋습니다. 유의해야 할 점은 내가 좋아하고 닮고 싶은 글과 내가 잘 쓰는 글이 꼭 같지만은 않다는 겁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하지만, 모방만 계속 해서는 창조의 단계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필사의 다음 단계는 따라 쓰면서 내 나름대로 변형해보는 겁니다. 단어와 표현을 바꿔가며 다르게 써보면서 어휘력을 기를 수도 있고, 반복되는 혹은 마음에 드는 문구는 그대로 두고 내 입장과 감정·생각에 맞춰 내용을 바꿔 써보는 연습으로 문장력을 키울 수도 있습니다. 필사가 모방이 아닌 창조가 되는 순간은 바로 이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단어나 표현을 바꾸는 것만으로 느낌과 의미가 달라질 때도 있습니다. “나는 잊어버렸다”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는 같은 뜻인 듯하지만, “기억하지 못한다”는 기억하지 못하는 걸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 하면서 과거를 되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또 대명사를 바꿔 써보는 연습은 관점에 변화를 줘서 다른 각도로 새로운 글쓰기를 할 수 있게 합니다. 1인칭으로 적혀 있는 글을 3인칭으로 바꿔 써본다거나 대명사로 적혀 있는 부분을 구체적인 누군가의 이름으로 바꿔보면 제한적으로 갇혀 있던 생각의 폭이나 시야가 넓어질 수 있습니다.

기왕이면 지금 짧은 글 쓰기를 연습하고 있으니까 필사를 하면서 한 문장을 짧게 줄이는 연습, 만연체를 간결체로 바꾸는 연습을 해보면 더 좋겠죠. 원래 내 글의 단점은 잘 안 보이는 법이라 다른 사람의 글로 연습하는 게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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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필기구로 두꺼운 종이에

한 글쓰기 수강생이 ‘숨은 신을 찾아서’(강유원)를 필사한 노트. 손소영 제공

저는 책을 읽으면서 그것이 글쓰기를 위한 책이든 공부를 위한 책이든, 기억하고 싶은 내용들이나 마음에 울림을 주는 구절들을 그때그때 적어놓고,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에는 그동안 적어놓은 내용들을 전체적으로 훑어보면서 제 나름대로 다시 구성하고 편집해서 저만의 콘텐츠로 정리해둡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마음을 울렸던 대사, 출퇴근길 거리에서 봤던 기발한 표현들, 카페나 음식점에서 들었던 대화 등을 접하면서 떠오른 생각이나 느낌도 같이 적어둡니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스톰’이라는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고 “마침표 다음에는 무엇이든 올 수 있어요. 새로운 길, 새로운 방향, 모든 기회가 열려 있고 모든 것이 가능해지죠”라는 대사가 가슴을 울렸습니다. 그래서 “물음표로 시작된 인생, 느낌표로 가득하길 바라다가 쉼표를 넣어야 할 때를 놓치고는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날이 오지만 마침표가 있어야 다시 새로운 시작이 생기는 법”이라고 끄적여뒀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내 생각과 느낌이 가미된 나만의 표현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어떤 음악을 들으면 떠오르는 나만의 기억이 있고, 어떤 냄새를 맡았을 때 생각나는 나만의 추억이 있는 것처럼 말이죠. 저는 이렇게 적어놓은 것들을 나중에 필요한 상황과 내용에 맞게 사용합니다. 필사를 하면서도 떠오르는 것들을 함께 적어가다 보면 필사가 모방에만 머무르지 않고 나만의 창작물로 변신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꼭 글로 재탄생되지 않더라도 이렇게 적어놓은 것들은 머리를 깨우는 신선한 자극이 되기도 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 통로가 됩니다. 무엇보다 뭔가를 쓰고 싶은 욕구를 샘솟게 합니다.

“요즘은 글도 컴퓨터로 쓰는데 필사는 손으로 해야 하나요?” 이런 질문도 많이 받습니다. 강의를 들으며 필기를 하는 것도 비슷한데, 타이핑을 할 때 받아 적는 정확도가 더 높은 대신, 손으로 쓰게 되면 자신이 쓰고 있는 내용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방식대로 중요한 부분만 요약하고 정리해서 쓰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타이핑하는 경우는 변형 없이 정확하게 그대로 몸에 익히는 방식이고, 더 깊이 기억에 남고 자신의 생각이 반영되는 건 손으로 종이에 쓰는 경우입니다. 그 효과를 더 크게 하려면 무거운 필기구로 두꺼운 종이에 꾹꾹 눌러쓰는 게 좋다고 하는데, 몸과 머리 모두에 자극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는 침대에서 나왔다. 따가운 햇살에 눈이 떠져서.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나는 된장국에 김치만으로 맛있게 밥을 먹었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오후 내내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음악을 들었다. 이 모두가 내가 좋아하는 일들. 차가운 밤공기를 마시며 남편과 산책을 했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나는 침대에 누웠다. 창밖엔 수국, 벽에는 우리 아이들의 그림이 걸려 있는 방에 있는. 그리고 꼭 오늘과 같은 또 다른 하루의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나는 안다. 어느 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미국의 시인 제인 케니언의 시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Otherwise)를 변형하면서 쓴 필사입니다. 저도 그렇지 않을 수 있었던 것들을 하나씩 떠올려보며 한 해를 마무리해볼까 합니다.

손소영 방송작가

물리학을 전공한 언론학 석사. 여러 방송사에서 예능부터 다큐까지 다양한 장르의 방송작가로 활동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짧은 글의 힘’, ‘웹콘텐츠 제작’ 등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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