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잔 잡을 여유 뺏던 꽃게요리의 변신 [ESC]
요리사의 실수담은 언제 들어도 놀랍다. 중탕해서 녹인 버터 한 냄비를 바닥에 쏟는 바람에 닦아내느라 고생을 한 적이 있다. 그걸로 끝났으면 다행이었다. 버터기름이 하수구를 막아서 물이 내려가지 않아 물바다가 됐다. 웬만한 식당 하수구에는 기름 거름망이 있지만 버터기름이 흘러가면서 딴딴한 고체로 변하며 하수구를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뜨거운 물을 잔뜩 뿌려 버터를 다시 녹인 뒤에야 하수구를 뚫을 수 있었다.
살아 있는 붕장어를 한 망 사가지고 수조에 넣다가 놓쳐서 다시 잡아들이느라 개고생을 했던 친구도 있었다. “나중에 내 옷 안에서도 한 마리 발견됐다니까.” 물론 ‘뻥’일 것이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붕장어가 서울 지하 하수구 세계에 서식하다가 화학폐기물을 접촉해서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상상을 하게 된다. 봉준호의 영화 ‘괴물’은 기왕이면 일식집 주방에서 탈출한 붕장어에서 출발했더라면 훨씬 생생하지 않았을까.
한손엔 술, 한손엔 꽃게?
또 다른 친구는 톱밥에 넣은 꽃게를 한 상자 샀다가 낭패를 보았다. 상자를 열어보니 꽃게가 죽은 듯 움직이지 않아 무심히 냉장고에 넣어두었다는 것이다. 다음날 거대한 주방용 냉장고 내부를 열 마리가 넘는 꽃게 특공대가 점령해버렸다. 심지어 손질해놓은 오징어까지 먹어치웠다고 한다. 꽃게가 그렇게 무서운 적도 없었다고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꽃게는 무시무시한 무기를 들고 갑옷을 입은 바다의 아이언맨이다. 먹성도 엄청나고 성깔도 대단하다. 어떤 물고기가 맛있다는 건 맛있는 먹이를 먹어야 가능하다. 꽃게는 바다에서 죽은 놈들을 처치하기도 하지만 온갖 맛있는 것도 먹고 자란다. 새우나 조개를 빠작빠작 부수어서 살을 발라 먹고는 퉤퉤, 껍데기를 버리는 육식가다. 톱밥 속에 담아 꽃게를 공수하는데, 이동하는 동안엔 스트레스를 받아서 숨죽이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면 무지막지하게 활동력이 좋아진다. 그래서 손질하기 전까지는 상자를 잘 닫아둬야 한다. 혹시라도 집에서 꽃게를 한 마리 놓쳤다고 치자. 특유의 잠망경 같은 ‘게눈’을 뜨고 화분 구석에 숨어 텔레비전 보는 당신을 노려보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오싹하다.
게장은 꽃게로 만드는 가장 뛰어난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에는 ‘간장게장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다고 한다. 그걸 먹자고 꽃게 철에는 한국행 비행기를 탄다고 한다. 간이 잘 배어 살살 녹는 부드러운 살과 내장은 흔히 밥도둑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꽃게는 이상하게 술안주로는 별로다. 우선 손에 게를 들고 양념을 묻혀가며 먹어야 하고, 찌개를 끓였다고 해도 술 한두 잔은 마시겠지만 살을 바르느라 연신 손을 놀려야 하기 때문에 술잔 잡을 여유가 없다. 술이란 잔을 들고 안주를 먹으면서 그사이 고요를 느끼거나 상대방과 대화하는 게 멋인데 꽃게는 도무지 번잡스러운 음식이어서 술에 집중하는 걸 방해한다. 더구나 꽃게 특유의 딱딱한 외투는 입술과 입가를 자극해서 술맛을 감소시킨다.(참고로 꽃게 껍데기는 다른 물고기로 치면 등뼈·가시가 몸 밖으로 나와서 만들어진 구조라고 한다. 뼈는 내장과 육체를 고정시키고 몸체의 구조를 만드는데, 꽃게는 그 역할을 껍데기가 한다는 것이다.) 먹다 보면, 꽃게 껍데기의 아린 성분 때문에 입가가 쓰리기도 하다. 여러모로 술안주로 좋은 음식이 아니란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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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암게, 맛도 좋고 저렴
그러다가 전남 목포에서 힌트를 얻었다. 살을 발라주면 될 것 아닌가. 목포에는 순살 꽃게무침을 밥에 얹어 파는 집이 몇 있다. 초원식당·장터식당이 유명한데 이 집에서 일하는 아짐(‘아주머니’의 호남 사투리)들은 꽃게가 들어오는 날이면 지옥이 될 것 같다. 꽃게무침이란 게 결국은 게살만 발라 수북하게 양념해서 밥에 얹어 먹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꽃게살을 바르는 특별한 기술이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여쭤봤다가 지청구만 들었다.
“(꽃게살을) 다 짜야 집에 가요. 그게 기술이여.” 꽃게 뚜껑을 연다. 솜털이 난 아가미를 떼어내고 게를 세로로 이등분한다. 그리고는 힘껏 쥐어짜서 살을 모으는 것이다. 다리에서는 살이 별로 나오지 않지만 그래도 아까우니까 쥐어짜 본다. 집게발 안에 살도 얼마 안 되지만 부수어서 성의껏 꺼내면 좋다. 그렇게 모은 살에 갖은양념을 하면 된다. 보통 목포에서는 파와 마늘, 설탕, 고춧가루, 간장, 설탕을 많이 넣어서 입가가 벌겋게 될 만큼 맵게 먹는다. 이건 살을 이미 발라서 나온 것이라 먹기 좋다. 그러나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너무 매워서 술안주로 먹기에는 한계가 있다. 또 내장과 (보통 알이라고 부르는) 노란색 생식소가 맛있는 암게가 아니라 주로 살만 취하는 수게다. 암게로 만들어볼 수는 없을까. 술안주로 딱 맞게 양념할 수는 없을까.
꽃게는 보통 ‘봄 암게, 가을 수게’라 한다. 게장 담그기 좋고 달큼한 생식소가 있어서 인기 있는 암게는 그래서 비싸다. 가을 수게가 흔하지만 암게가 없는 것도 아니다. 가을이 깊어지고 겨울이 오면 암게가 다시 살이 찌고 누런 내장이 밴다. 봄 암게 못지않다. 사람들이 잘 모르니까 가격도 좋다. 보통 봄 암게는 ㎏당 5만~6만원씩 한다. 가을엔 절반 내외로 떨어진다. 지난 8일, 인터넷에서 암게를 ㎏당 2만원에 샀다. 알이 거의 찼다. 횡재다. 게딱지를 열어서 끈적한 내포와 껍데기까지 박박 긁어보았다. 살은 몸통을 쥐어짜보니 꽤 많이 나온다. 양념해서 하루 냉장 숙성한 뒤 술안주로 먹었다. 기막히다. 혀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맛의 파도가 밀어닥친다. 고소하고 끈끈하며 지독하다. 감칠맛의 종합선물이다. 이틀·사흘 지나 맛이 더 좋아진다. 청주나 소주를 마시기에 최고다. 냉장고에서 5일이 넘으면 맛이 좀 비려지는 듯하다. 그 전에 먹어치워야 한다.
재료 및 조리법
꽃게·암게로 1㎏(살과 내장을 발라내면 대략 500~600g 나온다)
시판 양조간장 4큰술
고운 고춧가루 2큰술
다진 마늘 1큰술
설탕 1작은술
참기름 1작은술
후추 약간
액젓 1큰술
피넬 가루가 있으면 팥알 2개분
다진 쪽파 2큰술
청양고추 다진 것 1큰술
통깨 약간
1. 게살과 내장, 쪽파를 뺀 모든 양념을 섞는다.
2. 먹을 때 겨울 쪽파를 또 충분히 섞어 먹으면 완벽하다.
박찬일 글·사진 박찬일 요리사
익명과 혼술의 조합을 실천하며 음주 생활을 한다. 전국 왕대폿집 할매들 얘기를 듣는 중. 사라지는 것들에 매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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