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액 연봉 개발자 민철씨의 흑역사, 그의 ‘능력’ 따로 있더라

한겨레 2023. 12. 16.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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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전홍진의 예민과 둔감 사이][한겨레S] 전홍진의 예민과 둔감 사이
‘정답 없는 문제’의 시대
게티이미지뱅크

30대 남성 민철(가명)씨는 모바일 앱 개발을 하는 전문가입니다. 스마트폰 앱을 인공지능과 연결해서 빅데이터를 모으고 분석하는 시스템을 개발합니다. 그가 만든 시스템을 이용한 회사가 크게 성공하면서 민철씨 또한 업계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민철씨는 웬만한 전문직이나 회사 임원급보다도 훨씬 높은 연봉을 받고 있습니다. 업무량이 많아 매우 바쁘게 살고 있지만 새로운 앱을 개발할 때는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몰입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을 혼자 할 수는 없으므로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자주 만나 협업을 합니다.

‘짧은 시간에 문제 풀기’ 어려웠지만

잘나가는 그에게도 ‘흑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대학에 들어가기까지 엔(n)수생 시절을 보냈습니다. 고3 때도 그랬지만, 재수·삼수 때도 대학수학능력시험만 보면 제 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대학에 합격하지 못한 채 현역으로 군 복무를 했고, 전역 뒤 다시 수능 공부를 해서 지방 사립대 공대에 입학했습니다. 열등감을 갖고 있던 민철씨는 다른 사람이 자기 학력에 대해 물어보는 것을 무척 싫어했습니다.

민철씨는 대학을 다니며 자신이 프로그램 개발에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내고 이를 구체화하는 데 특출한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학과 친구들과 함께 해커톤 대회(기획자·개발자·디자이너 등이 팀을 이뤄 정해진 기간 안에 소프트웨어 등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공모전)에 참여해 1등을 차지했습니다. 1주일 대회 기간 동안 대학생 수준을 뛰어넘어 심사위원들이 깜짝 놀랄 만한 제품을 만들어냈습니다. 짧은 시간에 문제를 풀고 답을 맞히는 일은 영 재주가 없었지만 시간을 두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고 구체화하는 데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실행기능’(executive function)은 최선의 문제 해결을 위해 어떤 전략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구사할 것인지를 알고 적용하는 일을 말합니다. 여기서의 ‘문제 해결’은 자신이 현재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알고 적절히 조절하는 ‘자기점검’(self-monitoring)과 자신의 행동을 계획·진행·평가하는 ‘자기조절’(self-regulation)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현실에 적용한다면 잘 맞을 수도 있지만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비용이 소모되고 시간이 낭비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실행기능이 포괄하는 자기점검과 자기조절 능력을 통해 검증을 거쳐야 합니다. 이때 전문가들의 조언을 듣게 되는데 전문가들도 개인 경험과 지식에 한계가 있어 항상 맞는 것은 아닙니다.

민철씨는 뛰어난 실행기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앱 개발 일을 하다 보면 아이디어가 실제 비즈니스로 이어질 수 있을지, 사용자들이 어떻게 하면 잘 사용할 수 있을지 결정해야 하는 문제가 계속 생깁니다. 민철씨는 그때마다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 데 탁월했습니다. 실행기능은 타고난 재능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뇌의 전두엽과 관련이 있습니다. 전두엽이 발달한 사람은 책에서 읽은 내용이나 수업으로 들은 다양한 정보를 서로 잘 연결합니다. 그리고 남들이 파악하지 못하는 ‘미충족 수요’(unmet need)를 파악하는 능력도 뛰어납니다.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는 암기력이 좋고 정신운동속도가 빨라야 합니다. 이것은 전두엽의 기능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전두엽도 필요하지만 주로 측두엽과 해마 기능과 관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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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능력

민철씨는 뛰어난 전두엽 능력과 실행기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그를 평가해온 시험으로는 그의 재능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민철씨는 지능지수(IQ) 검사에 포함되어 있는 ‘토막짜기’ 검사에서 매우 우수한 점수를 보였습니다. 토막짜기 검사는 카드에 제시된 모형을 보고 빨간색과 흰색으로 구성된 정육면체 토막들을 이용해서 제시된 모형과 동일한 모양으로 맞춰보도록 하는 과제입니다. 토막짜기는 지각 구성 능력과 시각-운동 협응 능력, 비언어적 개념 형성 등의 통합 능력을 측정합니다. 민철씨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도움을 받아 이러한 자신만의 능력을 장점으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자신감을 가지고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려고 연습하다 보니 학벌에 대한 콤플렉스도 차츰 줄어들었습니다.

시험을 잘 보는 능력은 정해진 규칙대로 빠른 시간에 판단을 내려야 하는 의사·변호사 등 전문직군의 능력을 파악하는 데는 유용합니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문제를 풀어야 하는 수능이나 토익과 같은 시험을 잘 보는 사람들은 이러한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고 실행기능을 통해 이를 구체화하는 능력은 수능 시험만으로는 측정할 수 없습니다. 시험을 잘 보는 사람이 새로운 사업을 성공시키거나 노벨상을 받는 등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능력을 갖추기는 힘든 이유가 됩니다.

대학에서 해커톤 등의 공모전을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지고 이를 실행할 수 있는 학생들을 찾아내고 이들의 의욕을 고취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뇌는 신경과 신경 사이가 연결되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고 적용해보는 연습을 하면 전두엽의 네트워크가 더 풍부해지고 실행기능이 더욱 발달할 수 있습니다. 책을 읽으며 나와 다른 생각을 이해하는 연습을 하는 것도 실행기능 발달에 도움이 됩니다. 지식을 암기하거나 답이 정해진 문제를 풀이하는 것으로는 안 됩니다. 정해진 답이 없는 문제를 풀어가는 훈련을 하는 것이 뇌의 연결성을 만들고 실행기능을 발달시키는 데 필요합니다.

시험으로 평가할 수 없는 능력은 앞으로 더욱 중요해질 것입니다. 다만, 기초학력은 꼭 필요합니다. 기초학력의 기본은 ‘어학 능력’과 ‘수리 능력’입니다. 새로운 지식을 자신의 뇌 안에 저장하기 위해 꼭 필요합니다. 새로운 지식이 뇌 안에 많이 들어가야 실행기능이 뛰어난 사람이 전두엽에서 서로 연결시켜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디어를 내보고 이를 실제로 만들어가는 경험을 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험을 못 봤다고 해서 낙담하지 말고 숨겨진 자신의 새로운 능력을 발견해보세요.

전홍진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책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상담소’를 썼습니다. 글에 나오는 사례는 특정인을 지칭하지 않으며, 이해를 돕기 위해 여러 경우를 통합해서 만들었습니다. 자세한 것은 전문의와의 상담과 진료가 필요하며, 쉽게 자가 진단을 하거나 의학적 판단을 하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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