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팔리지만 ‘좋은 책’의 소중함

한겨레 2023. 12. 16.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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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실험실에서는 마이크로피펫 앞에 붙여 쓰는 플라스틱 팁을 닦아 썼다.

연구비를 확보하는 것을 '생계형'이라고 표현하면서 연구비로 책임자들이 뒷주머니를 채운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화가 난다.

판매량에 구애받지 않고 좋은 책을 낸 저자와 출판사를 응원하는 장치다.

앞으로 안 팔리는 좋은 책을 계속 만들 수 있는 구조를 만들지 못하면 한국 문화의 전성기는 반짝하다 사그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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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주일우의 뒹굴뒹굴 만화 _ 동경일일

오래전, 실험실에서는 마이크로피펫 앞에 붙여 쓰는 플라스틱 팁을 닦아 썼다. 팁은 소모품이지만 연구비가 넉넉지 않은 상황에서 아껴야 했다. 미국에서는 팁을 한번 쓰고 버린다고 했다. 믿을 수 없었다. 물론, 팁을 재활용하는 것은 주삿바늘을 다시 사용하는 것만큼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팁이 오염돼 실험 결과가 틀어질 수도 있다. 요즘은 우리나라의 어느 실험실에서도 팁을 닦아서 쓴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최근에 정부의 연구개발비 삭감 때문에 옛날 기억이 났다. 하루에 수백개, 수천개씩 쓰는 팁의 가격이 지금은 100개에 2만원 정도 하니, 다시 세제로 닦아 써야 하는 걸까?

이런저런 방법으로 시약과 비품을 아낄 전략을 짜내는 것은 어려운 시절을 지냈던 교수나 연구자들에겐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연구비에 포함돼 있는 학생들의 인건비가 줄어 미래의 과학자들이 꿈을 포기하는 경우를 보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연구비를 확보하는 것을 ‘생계형’이라고 표현하면서 연구비로 책임자들이 뒷주머니를 채운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화가 난다. 연구비를 사적으로 쓰는 것은 범죄다. 범죄라면 돈을 깎을 일이 아니라 죄를 물으면 된다.

정부는 연구개발 예산의 300분의 1 정도를 들여 우수도서를 선정해 도서관에 보급한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우수도서를 공정하게 뽑는 것이 어렵다면서 예산을 더 줄이고 있다. 이것도 ‘생계형 사업’이라고 보는 시각은 책 만드는 사람들 얼굴을 붉히게 한다. 우수도서 지원사업은 영세한 출판사 지원 사업이 아니다. 판매량에 구애받지 않고 좋은 책을 낸 저자와 출판사를 응원하는 장치다. 인류가 이룬 지식과 감정의 정화를 담은 책이 우리말로 보존되고 이어지기를 바라면서 만든 정책적 수단이다. 출판인들이 잘 팔리지 않는 좋은 책을 용기 있게 만들지 않았다면 한국 문화가 세계적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앞으로 안 팔리는 좋은 책을 계속 만들 수 있는 구조를 만들지 못하면 한국 문화의 전성기는 반짝하다 사그라질 것이다.

‘동경일일’ 속 시오자와는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뒀다. 창간한 잡지의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인기 있는 만화를 그리다가 그리고 싶은 만화를 그리면서 대중들에게 잊혔던 레이코의 장례식에서 자신이 꿈꿨던 잡지를 다시 만들기로 결심했다. 시오자와는 △만화를 그리고 있지만 빈껍데기만 남은 초사쿠 △과장된 연출에 호들갑 떠는 독자들에게 염증을 느껴 만화계를 떠난 아라시야마 △가족 생계를 위해 독자들의 마음을 끓어오르게 만드는 재능을 썩히고 있던 키소 △학습지 삽화로 호구지책을 삼던 니시오카 △잘 팔리는 만화를 그려야 한다는 강박에 아름다움을 놓아 버린 이이다바시에게 원고를 청탁했다. 시오자와는 이들이 잃은 것을 찾아 원하는 잡지를 만들 수 있을까?

한국에도 꿈을 따라 책을 만드는 수많은 출판인들이 있다. 응원하지 않는다고 그들이 꿈을 접지는 않을 것이다. 밥벌이는 중요하지만 그 이유만으로 책을 만들지는 않는다. 한 나라의 미래를 생각해서 정책을 만든다면 좋은 책을 선정할 방법을 더 연구하고 지원을 늘려갈 필요가 있다. ‘동경일일’은 연재 중이라 아직 결말을 모른다. 하지만 시오자와를 좀 더 믿고 기다려 준다면 독자들의 피가 끓고, 아름다운 상상을 현실처럼 느끼게 할 작품이 가득한 잡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주일우 만화 애호가

종이나 디지털로 출판되어 지금도 볼 수 있는 국내외 만화를 소개하고 그에 얽힌 이야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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