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에스트라’ 오프닝 크레딧으로 본 이영애의 숙명 [김재동의 나무와 숲]
[OSEN=김재동 객원기자] 어린 여자아이가 긴머리를 나풀거리며 뛰어간다. 어쩐지 무언가로부터 도망가는 느낌이다. 달려가는 아이는 이내 무대 위를 확신있게 걸어가는 마에스트라의 뒷모습으로 뒤바뀐다. 이어 ‘Sunflower’란 제목이 붙은 오선지가 나타난다. 하지만 거기엔 어떤 음표도 그려지지 않았다. 다만 굵은 먹으로 빗금만이 쳐져있다. 이어 시들어버린 꽃의 이미지를 찢고 나타나는 굳게 닫힌 방문. 방문 옆의 벽을 더듬어가면 아이의 목줄을 들어올리는 손그림자가 보인다. 이어 악보 위에 놓인 펜이 단검으로, 다시 바이올린으로, 주사기로, 지휘봉으로 바뀌고 이내 지휘봉을 쥐고 지휘하는 마에스트라의 모습이 보인다.
tvN 토일드라마 ‘마에스트라’(극본 최이윤·홍정희, 연출 김정권)의 오프닝 크레딧이다. 드라마의 분위기를 함축적으로 담은 이 오프닝 크레딧의 내용은 1화부터 확인이 가능하다.
피츠버그쯤으로 추정되는 도시의 밤거리를 걷는 여자, 이내 오픈 준비 중인 한 바를 찾고 거기엔 술에 절은 한 남성이 있다. “2시간 전이니 가자”는 여자의 요구를 남자가 거부하자 “아님 여기서 죽던가”하고는 총구를 겨눠 방아쇠를 당긴다.
이어진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공연. 여자는 지휘를 하고 있고 남자는 악장자리에서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 연주를 마친 후 악수를 나누는 여자와 악장의 대사. 악장은 “다신 보지말자”고 이를 갈고 여자는 장례식엔 꼭 참석하겠노라 다짐해준다.
그 여자 차세음(이영애 분)이 망해가는 더 한강 필하모닉의 지휘봉을 잡았다. 세계적 명성을 누리는 마에스트라의 귀국은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굳이 왜?”라는 의문과 함께.
한국에서는 3년 만에 재회한 남편 김필(김영재 분)이 대신 물어준다. “한국 오기 싫다고 했잖아?” 대답 대신 차세음은 말을 돌린다. “오랜만에 당신 피아노 연주 듣고 싶어.”
사실 차세음이 귀국 후 처음 찾은 곳은 요양병원이었다. 그 곳에서 세음은 택시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잠시 머물다 차를 돌렸다. 아버지 차기백(정동환 분)도 묻는다. “엄마한테 가 볼 거지?” 주저하던 세음이 말한다. “시간이 필요해요.” “그래 고맙다. 애비 말 잊지 않고 엄마 가기 전에 보러와줘서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차세음의 귀국은 요양병원의 어머니 임종을 위해서인 모양이다.
물론 다만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한강 필의 악장 박재만(이정열 분)은 왼손 4번째 손가락이 시원찮다. 이를 귀신같이 잡아낸 차세음은 비록 어린 시절 바이올린 스승였던 박재만이지만 가차없이 악장자리에서의 퇴진을 통보한다. 자격없는 악장을 무대에 세울 수는 없다면서. 이에 반발한 박재만이 20년 전 차세음의 잠적으로 한강 필이 겪었던 곤경을 지적하며 “너는 자격있냐?” 묻자 차세음은 대답한다. “빚갚으러 온 거예요. 그러니 자격은 충분하죠.”
마음의 빚을 졌던 한강 필의 부활도 차세음의 귀국 이유 중 하나였다. 다만 한강 필에 졌던 그 마음의 빚도 어머니 배정화(예수정 분)로부터 비롯된 모양새다.
아버지 집을 찾은 날 차세음은 두려움에 떨며 자신이 예전 쓰던 방문을 힘겹게 열어본다. 방문이 열리면서 기억의 문도 열렸다. 거기엔 청소년기의 차세음을 벽으로 몰아세운 채 목을 조르며 악다구니를 퍼붓던 엄마 배정화가 있었다.
그 엄마 배정화는 요양병원 창문으로 날아든 새를 보며 손을 뻗어보지만 그 손가락은 마비 증상을 보이며 뒤틀릴 뿐이었다. 이따금 지휘봉을 떨구는, 그리고 시야가 몽롱해지는 차세음의 증상은 엄마 배정화가 음악과 함께 차세음에게 떠넘긴 유전성 신경병증으로 보이며 20년 전 차세음의 잠적도 그 때문으로 짐작된다.
그러고보면 오프닝 크레딧에서 뛰어가던 어린 여자아이는 배정화, 혹은 음악으로부터 도망치는 차세음였고 완강히 닫혀있는 방문 안에서 목줄을 들어올린 손은 배정화였을 테다. ‘일편단심’이란 꽃말을 가진 선플라워는 하지만 텅빈 악보일 뿐이고 그조차 부정의 빗금이 간 채였으니 강요받은 음악세계에 대한 차세음의 부정적 심경을 대변하는 것으로 유추된다. 악보를 그려야할 펜이 단검-바이올린-주사기-지휘봉으로 뒤바뀌는 과정은 차세음의 음악에 대한 애증과 일탈을 상징할 테지만 끝내 지휘봉에서 변신을 마침으로써 마에스트라의 길이 숙명임을 암시한 셈이다. 결국 음악으로부터 도망치던 아이는 숙명을 받아들인채 확고하게 무대를 장악하는 마에스트라로 성장한다.
음악을 위한 차세음의 희생도 2화까지에서 충분히 노출됐다. 아빠에게 달려가 안기는 남의 딸을 서글프게 바라보는 김필에게 차세음은 묻는다. “혹시 아이 안가진 거 후회해?” 김필이 답한다. “난 당신만 있으면 되는데. 아빠 되는 게 쉽나? 나 좋은 아빠 될 자신 없어.” 미안함을 담아 세음이 말한다. “당신 좋은 아빠가 됐을 거야.”
세음이 아이를 포기한 데는 비단 음악에 대한 열정뿐 아니라 자신도 배정화 같은 엄마가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
차세음만 있으면 된다는 김필의 말은 거짓이었다. 그 씁쓸한 눈길이 아이를 원하고 있음을 웅변한다. 또 김필은 한강 필의 호른 연주자 이아진(이시원 분)과 불륜관계다. 김필의 일탈에는 독보적인 아내의 재능에 대한 열등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아진은 대담하게도 세음을 불러내 자신과 김필의 키스장면을 목격하게 한다. 그렇게 아이는 포기했고 남편은 배신했다.
그리고 대책없이 다가서는 옛 연인 유정재(이무생 분). 젊은 날 음악에 쫓겨 낯선 바다에 몸을 던진 차세음을 건져낸 것이 유정재다. 음악이 아팠던 차세음은 유정재 품에서 일탈을 함께 했다. 하지만 차세음은 다시 유정재를 버려두고 음악의 품으로 돌아갔었다. 끔찍하지만 버릴 수 없는 엄마처럼, 차세음에게 음악은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안기고 싶은 굴레인 셈이다.
한강 필을 인수하고 세음이 이혼하기까지 연주회도 중단시키겠다는 유정재는 어쩌면 세음에게 남은 유일한 한가지, 음악을 앗아갈 수도 있는 존재다. 유정재에게 음악은 불구대천의 연적일 테니까.
2화까지만에 인물간 관계도는 완성됐다. 지휘는 조율이다. 마에스트라 차세음이 오케스트라뿐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주변인물들의 인생까지 불협화음없이 조율해 나갈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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