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사 전공 역사학자들은 <서울의 봄>을 어떻게 봤을까
[주간경향] 영화 <서울의 봄>의 흥행과 함께 나타난 대표적 현상은 과거사에 대한 관심이다. 영화 속 주인공들의 12·12 군사반란 이후 행보를 추적한 보도가 쏟아지고 이들에 대한 재평가도 이뤄지고 있다. 특히 1980년대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대를 중심으로 이 시대를 다룬 책, 기사, 논문 등을 찾아보고 공부하는 ‘현상’들까지 생겼다. 잘 만든 영화 한 편이 44년이나 가려져 있던 역사를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한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시대에 대한 관심만큼 축적된 연구는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다. 실제로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의 굵직굵직한 몇몇 사건을 제외하면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특히 12·12 군사반란만 떼내 별도로 다룬 연구는 찾아보기조차 쉽지 않은 현실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우선, 이날 반란군의 행적에 대한 합의된 기록이 없다. 반란이 진행되는 과정을 보여줄 사료가 남았을 가능성은 더욱 없다. 그나마 2018년 경향신문이 국방부와의 소송을 통해 확보한 <제5공화국 전사>(이하 5공 전사)가 이날의 사실에 가장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이 책을 제작한 것이 제5공화국 관련자들이다. 즉, 승자의 입장에서 증언한 내용을 책으로 만들었다는 얘기다. 이마저도 가감해서 봐야 한다는 뜻이 된다.
영화 <서울의 봄>은 이처럼 제한된 정보 안에서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그날의 상황이 촘촘하게 펼쳐진다. 특히, 반란이 진행되는 과정을 시간 순서로 보여주며 마치 실제 현장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자아냈다. 대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허구인지 관객들로선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주간경향은 지난 12월 13일 역사문제연구소 소속 연구원 3명과 간담회를 마련했다. 이들은 모두 1980년대를 연구한 역사학자들이다. 권혁은 연구원은 ‘박정희 정권기 시위진압 체계의 형성과 변화’를 연구했다. 해당 시기 군, 경찰, 정보기관 등에 대한 전문성을 갖췄다. 김세림 연구원은 1980년 사북항쟁을 중심으로 전두환 정권기를 연구 중이다. 문민기 연구원은 박정희·전두환 정권기의 사회 정화 사업이 연구 분야다. 이들에게 역사학자적 관점에서 <서울의 봄>을 관람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들의 감상평 역시 첫마디는 “재미있다”였다.
“각 부대 영관급 장교들이 반란군 소속 장교들의 동기이거나 선후배다. 사령관이 출동 준비를 지시해도 반란군 측 연락을 받은 실무진이 ‘출동하면 안 될 것 같다’고 막는 것이다. 전두환은 사실상 준비단계에서부터 승리를 보장받고 반란을 시작한 셈이다.” - 문민기 연구원
-영화 <서울의 봄>을 어떻게 봤나
문민기(이하 ‘문’) “우선, 재미있었다. 흔히 12·12 군사반란의 시작과 끝은 알지만, 그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영화가 이 부분을 보여줬다는 측면에서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당시의 긴박감이 잘 드러나도록 이야기를 구성했다는 점이 좋았다.”
김세림(이하 ‘김’) “영화를 보고 처음 든 생각은 굉장히 이야기가 사실적으로 다가온다는 것이었다. 보통 잘 만든 영화를 보고 나면 ‘강의할 때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서울의 봄>은 ‘영화를 보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흔히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는 결말을 알기 때문에 재미가 반감되는 측면이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상황이 엎치락뒤치락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반란군을 진압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지 않을까’를 생각하게 되더라. 관객을 몰입하게 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권혁은(이하 ‘권’) “역사 영화라기보단 오히려 전투 영화에 가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전후 맥락을 생략하고 주인공들이 곧바로 선과 악의 구도로 맞붙는 상황 때문에 그랬다. 특히 시간을 알려주니까 마치 실시간으로 상황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잘 만든 영화다.”
-그렇다면, 역사학자로서 영화 <서울의 봄>은 어떻게 봤나.
문 “사실 12·12 군사반란 자체는 학계가 주목하는 연구대상은 아니다. 기록도 재판 과정에서 나온 증언이나 인물들의 회고록 정도만 남아 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이 사건을 재구성하는 데 도움을 받았겠구나 싶은 자료가 있었다. 2018년 경향신문이 입수해 공개한 <5공 전사>라는 책자였다. 이 책은 전두환의 지시로 1982년에 편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5공화국 출범 이전까지의 정치적 상황을 다루는데 10·26사태 이후부터 제5공화국 체제가 만들어지는 1981년 3월 국회의원 선거 당시의 상황까지를 포함한다. 전체 9권인데 이중 3권이 전부 12·12 군사반란을 다룬다. 제5공화국에서 펴냈다는 점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한다는 한계는 있지만 당시 상황을 시간대별로 상세하게 정리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진압군의 대응, 행적 등도 다 여기에 나온다. 영화를 보고 나서 비교해보니 더욱 <5공 전사>를 참고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영화에서는 2공수여단으로 나오는데 실제로 1공수여단이 행주대교를 넘어 서울로 진입하는 거나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한미연합사로 피신하는 장면들 모두 <5공 전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인물들의 당시 구체적 행보까지 참고해 캐릭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고증에 신경을 쓴 영화란 생각을 했다.”
권 “<5공 전사>를 참고했을 것이란 의견에 동의한다. <5공 전사>에서 12·12군사반란을 다룬 부분을 보면, 당시 주요 행위자들이 나눈 대화 내용이 그대로 기록돼 있다. 이 내용 중에 곧바로 영화 대사가 된 부분도 있다. 또 장태완 장군 수기나 회고록도 많이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보며 ‘군’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반란이 발생했는데 군부가 사실상 진압을 포기해버렸다. 이들은 반란을 진압하려는 쪽이 더 큰 희생을 당한다는 것을 5·16 군사정변을 통해 생득적으로 알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처럼 실제 인물이나 대립 구도는 영화보다 훨씬 더 입체적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김 “12·12 군사반란에 집중해 고증을 잘했다는 측면에 동의한다. 당시 반란세력과 진압세력의 움직임을 마치 체스판 위에 올려놓은 것처럼 잘 묘사했더라. 다만 이 군사반란으로 전두환 세력이 한국을 바로 장악했다고 오해하면 안 된다. 영화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당시 민주화를 향한 각계의 움직임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었다. 12·12 군사반란 이후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기까지 약 8개월이 걸렸다. 이는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을 겸임하고 정권을 장악해가면서 영화 제목이기도 한 <서울의 봄>을 무력화시킨 과정이기도 했다. 그 외에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극 중 최규하 대통령이 사후재가라며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연행 서류에 날짜와 시간을 명기하는 부분이다. 사실 이 부분은 나도 잘 몰랐던 내용이다.”
문 “그 부분은 영화적 상상력을 약간 가미한 측면이 있다. 새벽 5시쯤 노재현 국방부 장관과 전두환이 총리 공관으로 가서 결재를 받은 건 맞다. 최규하 대통령 자신이 결재 시각을 썼다는 증언도 남겼다. 그런데 그 문서가 실물로 확인되지가 않는다. 다시 말해, 그 시간에 결재를 받은 것은 맞는데 최규하 대통령이 실제로 문서에 시간을 남겼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증언 말고는 없다는 것이다. 사실 당연하기도 한 것이 전두환이 서류에 서명을 받아서 들고 가지 않았나. 전두환이 손에 넣은 서류를 어떻게 했는지 알 방법은 사실상 없다. 재판이나 국회 증언 과정에서 사후재가를 했다는 내용이 확인됐다지만 이와 관련해 남아 있는 문서가 없는 상태다.”
“원래 수경사령관이라는 자리가 굉장히 정치적인 위치다. 수경사가 박정희 대통령의 친위부대였기 때문이다. 그런 자리에 임명된 사람이 군인의 본분을 지켜서 해야 할 행동을 했다는 건 한편으로는 특이하고, 칭찬받는 것 또한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 권혁은 연구원
-사건을 압축한 영화이다 보니 맥락상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도 있다. 전두환은 시종일관 반란 성공을 확신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나.
권 “영화가 10·26 사건 이후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잘 설명이 되지 않은 부분이다. 사실 군인이 정치에 관여하거나 하나회라는 군내 사조직이 성장한 것은 박정희 시대의 유산이다. 박정희는 5·16 군사정변 당시, 서울 근교 부대들을 동원했다. 이후 유엔사가 이들 부대에 대한 작전통제권 요구하자 박정희는 자신을 겨냥한 역쿠데타 방지를 위해 서울 근교 부대인 제1공수전투단, 30사단, 33사단의 작통권만 빼고 반환하는 것으로 합의를 한다. 이들 부대를 모체로 해서 만든 것이 수도경비사령부다. 수경사는 핵심 부대인 30경비단, 33경비단, 헌병대 등으로 조직됐는데 이들 역할 중 하나가 반란진압이었다. 또 박정희는 수경사에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배치했는데 이들 중 하나회 소속이거나 후원자가 많았다. 이렇게 보면, 왜 12·12 군사반란 당시에 진압계획이 작동하지 않았을까, 왜 전두환은 반란 성공을 확신했을까를 이해할 수 있다. 반란을 진압해야 할 부대가 반란에 가담해 버린 상황이니 진압 계획이 있어도 실행이 안 된 것이다.”
문 “영화에는 이태신 장군을 비롯한 몇몇 사람이 반란군을 막으려 하면서 긴장감이 조성된다. 하지만 실제 12·12 군사반란 당시에는 이들을 제어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군 운영체계를 보면, 사령관이 지휘권을 갖지만, 실제 부대 운영은 모두 영관급 실무 장교들이 한다. 그런데 각 부대 영관급 장교들이 반란군 소속 장교들의 동기이거나 선후배였다. 사령관이 출동 준비를 지시해도 반란군 측 연락을 받은 실무진이 ‘출동하면 안 될 것 같다’고 막는 것이다. 전두환은 사실상 준비단계에서부터 승리를 보장받고 반란을 시작한 셈이다. 이날 발생한 유일한 변수였다고 한다면, 정승화 참모총장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총기 발사 사건이 터졌다는 것 정도다. 이로 인해 국방부 장관이 도망을 가고, 비상이 걸리는 바람에 상황이 조금 급박해졌다. 그럼에도 전두환 입장에서 반란이 실패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 “실제로 반란 과정에서 큰 전투는 벌어지지도 않았다. 영화가 묘사한 것처럼 계속 전화로 상황 확인만 하다가 끝난다. 오히려 이미 판세가 기울고, 뒤집기도 어렵기 때문에 전화 이상의 조치를 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영화는 당시 지휘관들 오판으로 진압군을 제때 동원하지 못한 것으로 묘사한다. 실제 반란이 성공한 요인은 무엇이었다고 보나.
문 “정보력의 차이다. 당시 반란의 성패는 하나회에 포섭되지 않은 9공수여단이 반란군을 진압하러 서울로 들어오느냐가 핵심이었다. 이때 특전사령관이 9공수의 출동을 명령하는데 실무 영관급 장교가 하나회 소속 장교에게 전화를 받는다. 내용은 ‘정승화 참모총장이 10·26 사건에 연루된 것 같아서 조사하려다가 충돌이 발생한 것이지 총장 납치와 같은 국가변란 사태가 아니다. 일단 대기하라’였다. 지휘관 입장에선 만약 이 설명이 맞을 경우, 군을 섣불리 움직였다간 반란군으로 몰릴 수 있다. 결국 대기가 최선인 상황이 되고 만다. 반면 반란군은 이미 모든 정보를 장악하고 자기들만의 지휘체계까지 갖추고 있었다. 전두환이 지시하면 노태우 9사단장, 박희도 1공수여단장이 군을 움직이는 구조였다. 정보가 차단된 진압군과는 움직임에서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권 “영화에서 진압군이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을 묘사하는 방식은 <5공 전사>의 시각이 반영된 것으로도 보인다. 반란군 입장에서 기술된 <5공 전사>를 보면 당시 진압군을 굉장히 무능력하게 그린다. 다만 절대 권력자가 사라진 상황에서 이들을 결정적으로 움직이려면 미국이 개입했어야 하는데 현재까지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것으로 확인된다.”
김 “영화에서 언급되긴 하는데 군을 움직일 경우 북한이 내려올 가능성이나 서울에서 충돌이 발생할 경우 시민의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느냐도 결코 가볍지 않은 문제다. 진압군의 행보를 군대의 본래 목적과 시스템을 바탕에 두고 보면 단순 무능력으로만 말하긴 어렵다. 선과 악의 뚜렷한 대비, 그리고 개탄을 자아내는 무능과 불의를 보여주기 위해 영화는 당시 상황을 더욱 극단적으로 묘사한 것 같다. 육군본부 내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군복을 입은 지휘관이라는 자들은 찻잔을 들고 한가로이 차를 마시고 있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장태완 장군은 상황을 다르게 본 것인가. 그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
김 “실제로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같은 대치는 일어나지 않았다. 수경사령관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사실도 없다. 다만 제 역할을 다 하려고 한 군인이 존재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높게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당시 군인이 정치화되지 않기 어려운 상황 아니었나.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려고 한 점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권 “원래 수경사령관이라는 자리가 굉장히 정치적인 위치다. 수경사가 박정희 대통령의 친위부대였기 때문이다. 그런 자리에 임명된 사람이 군인의 본분을 지켜서 해야 할 행동을 했다는 건 한편으로는 특이하고, 또 한편으로는 칭찬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문 “개인에 대한 평가를 떠나서 수경사령관으로서 반란을 막는 임무를 끝까지 수행하려 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책임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책임을 져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주어진 임무를 다하지 않았을 때 비극이 발생한다. 영화 속 육군본부에 있던 장군들이나 국방부 장관 등이 대표적이다.”
“영화 속 장면 중 전두광이 ‘세상이 그렇게 빨리 변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이게 영화가 전하려고 한 가장 큰 의미가 아닐까. <서울의 봄>이 과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이미 지나간 이야기라고 말하기도 어렵다는 의미다.”-김세림 연구원
-<서울의 봄>이 다룬 역사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경계해야 하나.
김 “두 가지다. 하나는 영화 속 장면 중 전두광이 ‘세상이 그렇게 빨리 변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어쩌면 이게 영화가 전하려고 한 가장 큰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현대사를 다룬 <서울의 봄>이 과거 이야기를 하지만 지나간 이야기라고 말하기도 어렵다는 의미다. 이 영화를 두고 ‘좌빨영화’라며 갈등 상황이 벌어지고 있지 않나. 12·12 군사반란이 박정희의 유산에서 시작했는데 그 시대에 통용됐던 이야기가 지금도 나오는 상황이다. 영화를 통해 ‘역사는 단순히 지나간 일이 아닌 현재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토대’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서울의 봄>에 나오는 시민들은 차량 통행이 제한돼도, 군인들이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져도 무슨 일인지 모른다. 오직 사건의 객체로만 존재한다. 관객분들이 이러한 장면을 통해 좀더 예민한 시각으로 우리 사회를 감시해야겠다고 생각해준다면 더욱 좋을 것 같다.”
권 “이 영화를 통해서 우리는 어떤 부분에 대해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지 한 번쯤 고민해 봤으면 한다. 실제 역사도 그러했지만, 반란군을 진압하라고 할 때 그 누구도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런데 부마항쟁이나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군은 모두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변명한다. 어떤 명령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고 수행하고, 또 다른 어떤 명령에 대해서는 책임감 없이 방관해 버린다. 영화를 보며, 우리가 진정 책임을 지고 수행해야 할 일은 어떤 것인지 고민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 한 가지 덧붙이면, 영화를 보고 난 후 생긴 분노가 전두환과 하나회를 향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한다. 이미 사라져 버린 대상에 대한 분노보단 우리 삶에서 또다시 벌어질 수 있는 일에 분노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문 “전두환 정권 관련 논문을 쓰면서 정권을 ‘절대악’으로 그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권을 절대악으로 그리는 순간 전두환 정권이 사라지고 나면 마치 모든 문제가 해결될 듯한 착각에 빠져들 수 있어서다. 과거든 현재든 악마 같은 정권이 사라진다고 해서 우리의 문제가 모두 해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문제를 만들고 야기한 근본적인 원인은 정권이 아닌 한국사회 내부에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점을 함께 고민해 봤으면 좋겠다.”
-<서울의 봄> 관람 이후 ‘역사를 배웠다’는 감상평이 많다. 실제 역사와 영화 <서울의 봄>은 어느 정도 유사하다고 해야 하나.
문 “<삼국지 정사>와 <삼국지 연의> 느낌으로 보면 된다. <삼국지 연의> 속 인물들의 의미지, 사건 등으로 역사를 기억해도 큰 틀에서 완전히 틀린 역사라고 하기는 어렵지 않나. 12·12 군사반란사에서도 <5공 전사>와 영화 <서울의봄>이 비슷한 관계에 있는 것 같다. 실제 역사와 세세한 부분에서 조금 어긋나더라도 큰 흐름을 이해하는데는 부족하지 않다는 의미다. 다만, 연구자 입장에서 역사적 인물을 절대악과 절대선이라는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은 경계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5공 전사>를 보면, 정승화와 장태완의 연결고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들이 학맥으로 연결되고, 군 생활도 같이했고 하는 식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영화처럼 절대선과 절대악의 격돌이 아닌 군인의 외피를 쓴 파벌 간 격돌로 볼 수도 있다. <서울의 봄>을 통해 사람들이 역사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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