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보면 분통 터질 역사…‘경복궁 점령’도 있소이다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도 풀어낼 만
[주간경향] 1894년 7월 23일 자정 무렵. 일본군 제5사단 혼성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가 출동 명령을 내리자 먼저 서울·의주와 서울·인천 사이의 전신이 끊겼다. 청나라군의 통신망이 차단됐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작전의 시작이었다. 이날 새벽 4시 보병 21연대가 경복궁 서쪽 영추문에 도착했다. 문을 부수려고 폭약을 터트렸으나 비 온 뒤라 실패했다. 영추문을 경비하던 평양 기영병과의 교전 끝에 오전 5시 무렵 이들을 제압하고 영추문을 도끼로 부숴 열었다. 궁내로 진입한 일본군은 곧장 광화문으로 달려갔다.
광화문을 지키던 장위영 군사들과 교전이 벌어졌는데 조선 병사들은 배후에서 쏘는 총에 맞아 쓰러졌다. 동문인 건춘문에서도 전투가 벌어졌고, 결국 밀려서 문이 열렸다. 궁을 장악한 일본군은 궁궐의 모든 문을 열어젖혔다. 이후 곧장 고종이 머무는 북쪽으로 내달렸다. 수색 끝에 임금과 왕비가 옹화문 안쪽 함화당에 숨은 사실을 알아냈다. 제2대대장 야마구치 게이조 소좌를 비롯한 일본군 2대대 병력 일부가 옹화문 앞에 도착해 호위병에게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호위군사들은 칼을 빼들고 문 안에 돌입하려는 일본군에 겁을 먹고 무기를 넘겨줬다.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와 함께 고종 앞에 선 게이조는 “귀국 병력이 이미 우리에게 무기를 내주었습니다. 우리 병사가 옥체를 보호하여 결코 위해가 미치지 않게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일본 참모본부 편찬 <일청전사> 재인용). 오전 9시 조금 지난 때였다. 경복궁을 점령한 뒤 일본공사관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탈출을 막기 위해 궁궐을 철통같이 에워쌌다. 조선군이 이날 오후 2시까지 산발적으로 저항하자 왕을 협박해 명령을 내려 조선군을 무장 해제시켰다. 일본 공사는 이어 운현궁에 있던 흥선대원군을 섭정으로 추대해 친일 정권을 출범시켰다.
이듬해 명성황후를 살해한 을미사변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경복궁 점령은 일본이 남의 나라에서 불법적인 쿠데타를 단행한 사건이다. 그간의 일본 측 주장처럼 조선군의 발포로 시작된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뚜렷한 목적과 주도면밀한 계획하에 이뤄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청일전쟁 이틀 전 조선조정을 장악해 후방을 다지고, 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일본의 역사학자인 나카츠카 아키라는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2002)에서 “조선 군대를 무장해제시킴으로써 일본군이 남쪽에서 청나라 군대와 싸우는 동안 서울의 안전을 확보하고 동시에 군수품 수송과 징발 등을 모두 조선 정부의 명령으로 시행하는 편리함을 얻는다는 목적 아래 계획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동학농민혁명을 영화로 만든다면
경복궁 점령은 그해 1월 10일(이하 음력 기준) 녹두장군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고부관아를 점령하면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사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정조의 죽음 이후 19세기 내내 세도정치와 탐관오리의 수탈로 백성의 삶은 도탄을 벗어나지 못했다. 국력은 쇠약해졌고,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침탈이 본격화됐다. 살기 힘들어질수록 동학의 평등사상, 생명중시 사상에 동조하는 이들이 늘었다.
권력의 타락과 부정의, 고통받는 백성과 외세의 침략은 시대를 초월하는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점에서 평등한 세상, 해방된 세상을 꿈꾼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은 영화의 소재로 손색이 없다. 하지만 그간 제작된 영화나 드라마는 한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가장 최근 영화로는 일본의 마에다 겐지 감독의 다큐영화인 <동학농민혁명 고추와 라이플 총>(2016)이 있고, 극 영화로는 <동학난>(1962), <개벽>(1991)이 있다. 드라마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1994), <녹두꽃>(2019)뿐이다.
사실 동학농민혁명은 <서울의 봄>이 다룬 12·12 군사반란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큰 사건이다.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는 “전라·충청을 비롯해 경상도의 상당지역과 강원·경기·황해도까지 전국적으로 수십만명이 참여해 수만명이 일본군에 학살당했다. 경복궁 점령으로 왕과 왕비가 포로로 잡히고, 정부가 좌지우지됐다. 정부 대신들이 일본 공사관에 수시로 들어가 지시를 받았다. 한국은 그 이후 일본의 지배 아래 놓였다. 제국주의 세력의 월등한 무력 앞에서 죽고 또 죽어도 대응해 많은 사람이 희생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그런 사건이 한국에서 벌어졌는데 그 의미가 제대로 부각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동학농민혁명사 전문가들은 당시 일련의 사건들을 영화로 만든다면, 경복궁 점령이 결정적 장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일본 사무라이들이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 목에 칼을 대고 인질로 잡은 후 국정을 농단한 사건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청일전쟁은 경복궁 점령에서 시작했다. 청나라와 전쟁을 하기 위해 미리 정지 작업을 한 것이다.”(문병학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기획운영부장) “일본은 우연히 일본군이 행진하는데 광화문 근처의 관군이 총을 쏴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주장하는데, 새벽에 남의 나라 궁궐 옆에 군대가 행진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이미 전날 밤 현재의 서대문형무소 자리에 일본군이 배치되고, 이들이 새벽에 산을 넘어와 경복궁을 공격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런 장면을 영화에 담을 수 있을 것이다.”(신영우)
동학농민군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청일 양국 군대가 들어오자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과 조정은 전주화약(5월 8일)을 맺고, 이들에게 철군을 요청했다. 조선 침략의 목적을 갖고 온 일본군은 그러나 오히려 서울에 병력을 집중시켰다. 경복궁을 점령한 후엔 동학농민군 진압에 나섰다. 일본 공사의 강요로 조선 정부가 일본군에게 진압을 요청하는 형태로 조작했다. 대규모 학살을 앞두고 자신들의 책임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 당시 일본 총리는 이토 히로부미, 농민군 토벌을 총지휘한 이는 일본 참모차장인 가와카미 소로쿠였다.
조선 관군과 양반 유생이 조직한 민보군, 보부상이 일본군과 함께 농민군 토벌에 나섰다. 그러나 작전을 주도하고 지휘한 쪽은 일본군이었다. 우금티전투 이후에도 내포와 해미, 태안, 아산, 당진, 장흥, 보은 등 전국 각지에서 농민군과 일본군·관군이 전투를 벌였다. 강원도 자작고개전투에서 800여명이 숨지는 등 각지에서 농민군이 수백~수천명씩 무차별 학살당했다. 신 교수는 “청일전쟁 당시 유일하게 후방에서 일본군을 공격한 게 농민군이었다. 이걸 진압하기 위해 살육명령을 내렸다. 초기엔 공을 세우기 위해 구체적으로 얼마 죽였다고 보고하지만, 이후엔 너무 많이 죽여서 국제문제화가 될 것을 두려워해 전투 보고서에 밝히지 않았다.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감췄다”고 말했다.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니 지금까지 진상규명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형제복지원 사건도 영화 소재로 관심받아
동학농민혁명은 어디에 초점을 두냐에 따라 다양하게 다룰 수 있다. 평등사회를 지향하는 움직임에 주목할 경우 민관합동 자치기구인 집강소로 이야기를 풀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이 올해 5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을 때도 이런 의미가 주목받았다. 농민군 총사령관이었던 전봉준과 강경파 지도자였던 김개남, 황해도에서 농민군에 참여한 백범 김구 등 역사적 인물과 함께 기록의 틈을 메울 가상의 인물들도 필요하다.
정우봉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는 “전봉준이 남긴 기록은 없고 신문조서 형태로만 있다.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에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 전봉준을 비롯해 여러 인물의 생각과 활동 지역, 시기가 조금씩 달라 이들을 묶을 작가적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문학계에서 동학농민혁명은 <용담유사>와 같은 동학가사 연구가 주로 이뤄졌고, 소설은 있지만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한 작품은 없다. 정 교수는 “굉장히 스케일이 크다는 점에서 얼마나 대중적으로 흡인력 있게 만드느냐, 반부패·반외세라는 주제를 얼마나 호소력 있게 드러내느냐가 중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의 상황과 연결지어 생각할 부분이 있어야 역사적 사건을 영화화할 때 성공할 수 있다. 연산군 시절 채홍사를 다룬 영화 <간신>의 시나리오를 쓴 이윤성 작가(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부이사장)는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역사학자를 만나면 왜 다들 동학을 건드리지 않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한다. 그런 점에서 다음 주자로 동학농민혁명도 가능하다고 본다. 다만 기본적으로 역사물은 이런 역사가 있었다는 식의 교육·계몽 수준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는 일에 비춰볼 수 있어야 한다. 그 역사가 현재의 정치나 사회현상을 미러링할 만한 소재가 될 수 있는지가 사극 작업을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한 고려 요소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이윤성 작가는 영화 시장이 어려울수록 제일 만들기 어려운 작품이 역사물이라고 했다. 기본적으로 작가가 오롯이 창작해 만드는 경우 자료조사부터 집필까지 시간이 상당히 걸리고, 이를 다시 영화 제작단계에서 되풀이한다. 그 과정에서 아이디어가 추가되고 빠지면서 계획 자체가 어그러지거나 시간이 더 걸리게 된다. 분장과 의상, 세트장을 만드는 데 제작비도 많이 든다. “영화계가 전체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라 <서울의 봄> 하나로 다시 시대극이 붐을 일으키긴 쉽지 않다. 제작비 부담이 크기 때문에 중구난방식이 아니라 정말로 매력적인 소재의 작품을 중심으로 만들어질 것 같다.”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도 강제와 억압, 폭력의 피해를 증언하는 현대적 역사물로 다뤄볼 만하다고 했다.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부랑자를 선도한다는 명목으로 일반 시민과 어린이를 불법 납치·감금하고 강제노역을 시키는 과정에서 구타, 성폭행 등 잔혹한 인권유린이 자행된 사건인데, 그 과정에서 589명이 숨졌다. 이 작가는 “올림픽을 앞두고 부랑자를 청소하자는 의미로 시작됐는데, 아직도 그 피해 보상 요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군부 독재로 피해를 본 사연이 많은데, 형제복지원이 이런 ‘억압류 스토리’의 대표적인 소재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주영재 기자 j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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